청주 목사 이충담이 춘절을 불러 마침 그 당시 청주에 내려와 묵고 있던 동주 성제원에 대해 귀뜸해주었다. “그분은 성삼문 선생의 후손이시며, 서봉 유우 산생의 수제자이기도 하시다. 그분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지리학, 의학, 복술 등을 연구하여 그 분야에 정통한 지식을 갖고 계신다. 한때 나라에서 그분에게 보은 군수 자리를 주었으나, 그분은 직책을 맡은 지 얼마 안 되어 자리를 내놓고는 그 후로 지금까지 주유천하하고 계신다. 이 시대 문장가요, 학자를 소개해줄까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고?” 이렇듯 친절한 목사의 청을 그녀는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다소곳이 받들었다. 그날 저녁에 성제원과 춘절의 첫 대면이 이루어졌다. 비록 나이 차이는 많이 났지만,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의 내면을 털어놓고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저러나 나를 따르자면 고생이 심할 텐데 걱정이로다!” “소첩을 버리시지만 않는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기꺼이 모시겠습니다.” “난 가진 게 전혀 없는 사람이라네. 그래서 고생이 여간 심하지 않을 텐데 그래도 괜찮겠는가?” “그 대신 선비님을 모시는 영관을 누리게 되잖습니까? 그것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그 후 성제원은 며칠 동안 춘절의 집에서 머물다가 춘절과 함께 팔도유람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이 떠나는 날 청주 목사는 춘절을 은밀히 불러 그녀에게 옷과 여비를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이후 두 사람의 낭만적인 주유천하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바람 따라 물 흐르듯이 떠돌아다니면서 다소 고생스럽고 힘들었지만 마치 사이좋은 한 쌍의 원앙새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육체적 관계없이 오직 정신적 교우만을 나누며 순결하게 지냈다. 그러는 중에 성제원은 틈나는 대로 시까지 곁들인 그림을 한 폭 한 폭 그려나갔는데, 그들이 다시 청주로 돌아왔을 때는 그림이 수십 폭에 이르렀다. 성제원은 그 그임 수십 폭을 그동안 자기와 끝까지 동행해준 춘절에게 주고 자신은 홑몸으로 한양으로 상격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54세의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춘절은 여러 달은 시름에 잠겨 슬피 울며 지냈으며, 그 후로도 그녀는 50여 년 동안이나 줄곧 성제원만을 그리며 처녀의 몸 그대로 수절하며 지냈다. 그녀가 칠순이 되는 어느 날, 성제원의 손자가 감찰이라는 벼슬을 달고 청주에 들렀다가, 우연히 춘절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감찰은 수소문하여 춘절을 찾았고 어렵사리 대면하는 자리에서 정중히 안부를 물었다. “진즉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늦어 면목 없습니다. 50여 년을 수절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춘절은 감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감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을 뵙는 듯하여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저승에서 이 소식을 들으신다면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저에게 주신 그임을 아직도 제가 간직하고 있사온데, 그것을 감찰님께 전해드려야 할 때가 온 것 같군요. 저는 후사도 없고 하니 그 그림을 저 대신 맡아주십시오. 춘절은 수십 년 동안 유일하게 위안으로 삼아오던 소중한 성제원의 그림을 성 감찰에게 모두 주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그녀는 성제원을 변함없이 사모해온 가슴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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