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호는 그 후 연선군3년에 나이 43세로 죽었다. 연산군 말년에는 상림춘이 이미 나이가 많아 가흥청이라는 이름으로 거문고를 가르치는 일만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애인 신종호에 대한 생각은 더욱 아련했다. 중종말기, 상림춘의 나이는 칠십이 되어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 이상좌에게 지난날에 신종호와 놀던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이상좌는 즉시 그림을 그리고 위에 신종호가 지은 시를 써 주었다. 상림춘이 그림을 보니 40년 전에 놀던 화려한 날들이 눈에 선했다. 다시 전에 같이 놀던 문익 학자들에게 화찬을 써달라 했다. 먼저 호음 정사룡에게 부탁했다. 호음은 붓을 들어 먼저 서문을 썼다. “금기 상림춘은 나이 72세이다. 아직도 그 기술이 그대로 남아있어, 옛일에 대한 감상에 때로 눈물을 흘린다. 그러므로 지금 그녀의 거문고는 원망하는 듯한 곡조가 많다. 나에게 시를 써달라 하므로 그의 간곡한 청을 불쌍히 여겨 일률을 쓰노라.”
열세 살에 거문고를 배워 어느덧 그 재주 뛰어났구나. 귀인들과 항상 연석하여 놀고 또 궁중에 들어가 새로운 곡을 연주했네. 꾀꼬리 같은 그 소리 꽃 사이에서 우는 듯 시냇물 가늘게 흐르듯 울리노라. 그 재주 더욱 뛰어나 그 이름 오래도록 전하리.
다시 그 다음에는 모재 김안국이 칠언절구로써 찬을 썼다.
꽃 같은 얼굴 사라져도 재주는 남아 애조 띤 거문고에서 그윽한 소리 나네. 그 소리마다 늙어가는 것을 원망하듯 부생도 늙은 것을 어찌하리.
이와 같이 상림춘은 늙어가도 그녀의 거문고 소리는 여전히 전과 다름이 없었다. 이 화폭은 그 후 정순붕, 홍언필, 성세창, 신광한 등이 계속하여 글을 보태 큰 화폭으로 되어갔다. 심수경도 소년 시절에 상림춘을 보고 역시 화폭 밑에 한 수 써주었다. 명기에 대한 유명 인사들의 찬사의 들이 담긴 이 한 폭의 그림은 임진왜란 이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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