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처럼 무정한 것이 또 있을까. 세월은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도 않으며, 물론 사랑하지도 정을 주지도 않는다. 말없이 저 혼자 흐르고 있을 뿐이다. 오죽했으면 옛 노래 가사에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나 매어 볼까"라고 하면서 가는 세월을 원망하고 아쉬워했으랴! 농경사회에는 농사가 천직(天職)이였으니 씨를 뿌리고, 정성들여 돌보아 가꾸고, 알찬 수확을 바라는 사람들은 그 어느 순간순간마다 날씨와 관련이 없을 수 없고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세계의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양력(太陽曆)을 쓰고 있지만 동양에서는 음력(太陰曆)을 써왔고 음력은 삭망(朔望)을 기준으로한 달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태양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태양의 움직임에 맞춰서 24절기를 만들었다. 24절기는 입춘(立春)은 봄의 시작이요, 우수(雨水)는 눈이 그치고 비가 온다는 식으로 계절의 특성과 변화를 알리는 것은 틀림없으나, 중국 주(周)나라 때, 그 지방의 기후에 맞춰졌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기후와는 잘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옛 선조들은 이 절기를 참고해서 계절의 변화와 기후를 짐작하고 농사를 지어 왔음을 볼 때, 춘하추동 절후별 세시풍속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 속에서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워 응용해 왔을 것이고, 24절기의 의미도 거기에서 찾아야할 것 같다. 특히 얼마 전에 지나간 춘분(春分)은 황도(黃道)를 따라 공전하던 해의 위치가 하늘의 적도와 교차하는 때라서 밤과 낮의 길이가 같고, 춘분점이라고 해서 황도의 기준점으로 삼는 절기다. 불교에서는 춘분 전, 후 7일간을 봄의 피안(彼岸)이라 하여 극락왕생의 시기로 삼기도 하고 '꽃샘에 설늙은이 죽는 다'는 속담처럼, 견디기 힘든 꽃샘추위와 꽃샘바람이 짓궂게 불어오는 시기이기도 하다. 올해는 유난히 늦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춘분이 지나면서 산에는 생강나무, 산수유가 노랗게 피고, 뜰 안에서 매화도 한창이다. 뒤를 따라 개나리가 피고, 수선이 피고, 진달래가 피고, 춘란도 뒤질세라 꽃망울을 터트린다. 꽃샘바람이 아무리 심하고, 꽃샘추위가 제아무리 매워도 어김없이 세월은 꽃들의 지저귐과,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와,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합창소리를 듣게 한다. 선운산 동백은 늙음이 싫어 요절(夭折)해버리는 슬픈 사연이 있는 꽃이지만 요절도 두렵지 않은지 한창 피기 시작하여 고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세상의 이치가 다 그렇듯이 이분법(二分法)만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춘설(春雪)을 보내고 날씨는 풀렸으나 아직도 앙상한 가지에 싹이 돋을 생각도 못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이제 뾰족이 얼굴을 내놓는 놈도 있고, 너무 가녀려서 안타깝기까지 한, 눈 속에서 수줍게 돋아났던 새싹은 제법 자라서 어른스러워 진 놈도 있다. 꽃이 피고, 새싹이 돋고, 바람이 부는 것 모두가 세월이 몰고 온 봄 탓 일게다. 봄은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계절이요, 무지개를 쫒듯 희망에 부풀어 오르는 계절이다. 잡다한 세상살이의 시작이 있고, 소년의 마음에 사랑의 애틋한 감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도 한다. 길 건너 저편에서 봄이 찾아 왔는데, 그 봄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데, 어쩔 것인가! 이미 봄바람 속에 봄과 하나가되어 버렸음을 느끼고 있는데... 며칠 전 산림조합 나무시장에 가서 장미와 목단과 감나무와 매화나무를 사다가 좁은 땅 이 곳 저 곳에 밀식하듯 심어놓았다. 인간의 일생이 유한(有限)하듯, 저 감나무, 매화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을 수 있고, 장미와 목단 꽃을 볼 수 있을까 의심을 하면서도 꽃을 심고 나무를 심는, 그리고 뭇 꽃들의 향연을 반기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 심정은 필자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봄을 생기요 활기라고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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