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증산읍에 박생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조상 대대로 이곳에 뿌리박고 내려오는 집안으로 농사를 지어왔으나 가풍이 글을 숭상하여 집에서 글 읽는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읍 사람들은 박생의 집을 가리켜 글방이라 불렀다. 읍내에서 공부 잘한ㄱ다는 소년들은 반드시 한 번은 이 집 문을 두드리는 데서 그런 별명이 생긴 것이다. 박생은 자질이 총명했다. 여섯 살 때 저녁을 먹고 이부자리 속에 들어가 엎드린 채 천자문을 순식간에 따로 베껴놓은 일이 있어 동내 어른들이 재미 삼아 시험해본즉 과연 서슴치 않고 줄줄 써 내려 어른들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놈아까운걸”하고 한숨을 짓곤 했다. 근처 집에거 온 읍내로, 이웃마을에서까지 천재라는 칭찬을 듣고 집안에서도 귀하게 자라 박생의 나이 대장부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할아버지가 “그놈아까운걸”하던 말의 뜻을 알 수가 있었다. 당시는 농사나 지어 먹고 사는 사람은 천대를 받고 벼슬을 살아야 사람다운 사람이라 하여, 벼슬하는 것이 유일한 출셋길이던 때였다. 벼슬을 하려면 우선 과거를 보아야 하겠는데 몇 번 60리 길 한양을 가서 시험을 봐야 평안도 태생으로는 가망이 없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소년의 학업이 얼마만큼이나 닦여졌던 것인지는 자기만이 아는 일이나, 멀고 먼 길에 몇 번 낙방하고부터 박생의 생각은 달라졌다. “내 글이 급제한 과생에게 지지 않을 터인데 번번히 낙방하는 것은 운수가 나빠서라기보다 차별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을 할까? 처음에는 앞길이 막막했다. 농촌에서 밭이나 갈고 틈틈이 아이들이나 가르치면서 마을을 지키면 그만이겠으나 젊은 혈기라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읍내 사람들은 그가 낙방학고 돌아올 적마다 “과거야 운수 탓이지”하며 위로해주었으나 그것이 자기를 비웃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박생은 결국 다시 벼슬을 꿈꾸지 않기로 결심하고 부모에게 팔도강산 구경이나 하겠다 하고는 집을 나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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