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일찍 저녁을 먹고 그곳에 갔다. 새로운 노래가 기다리고 있으려니 기대했으나 글발은 눈에 띄지 않았다. 혹 신병이 생기지나 않았나, 너무 일찍 왔나, 무료하기 짝이 없어 뒷짐을 지고 오락가락하노라니 열대여섯 살가량 되어 보이는 계집애가 타박타박 올라오더니 박생을 보고 머뭇거리다가 “저, 이 편지 좀 봐주시어요”하며 두 손으로 편지를 주었다. 펼쳐보지 않아도 낯익은 노래의 주인공인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소녀가 허리를 굽히나이다. 소녀가 응당 모시러 가야 할 것이오나, 외람되이 하녀를 시키옵는 것은 춘향전 고사를 본받는 것은 아니옵고 다만 소녀가 면대하기가 난처하와 이렇게 조처하오니 모든 것을 헤아리시사 누추한 집이오나 왕림하시면 삼가 사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간략한 글을 올렸다.
사나이 대장부가 기생방을 찾아서 으슥한 골목길을 다니는 것을 풍류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한편 요즈음에 와서는 한 번 더 밉살스럽게 생긴 얼굴을 보았으면 하는 사모의 정이 두터워진 것을 어찌할 수 없는 박생이었다. 박생은 결심을 하고 하녀와 함께 성안으로 내려갔다. 하녀가 인도하는 골목길을 따라 막다른 골목 초가집 앞에 이르니 문고리를 부여잡고 기대어 선 채 소복의 그 기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버선발로라도 뛰어나올 기색인 그 여자가 웬일인지 문끈 잡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녀가 달려들었다. 눈물이 글썽글썽 고이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박생이 여자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가서 누인 다음 방 안을 둘러보니 한쪽에는 약탕관이 있고 병석인 듯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일전부터 너무 죄를 지어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산호주,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은 탄실이올시다.” 산호주, 언제인가 절에서 남자를 싫어하는 명기라는 소문을 들은 일이 있는 박생이었다. “나야말로 용서를 받아야겠소. 처음에는 정말 화냥으로 취급하고 좀 골려주려 했으니 말입니다. 예, 이름을 익히 들어 압니다.”
산호주는 역시 병석에 있었다. 자기 말로는 감기라 하나 사실 상사병인 듯했다. 더구나 박생이 방 안에 들어서자 생기가 나기 시작하는 산호주였다. 그들은 오랜 벗처럼 가까워졌다. 벼루와 먹을 준비시켜 산호주는 노래를 부르고 박생은 글로써 받아 썼다. 박생은 받아쓰다가 그만하고 말했다. “자, 우리 더 쓰면 재미없으니 이만하고 끝을 막읍시다.” “끝을 막아요? 호호, 제가 허리를 굽히고 도련님이 찾아오셨으니 그만 끝을 막을까요?” 산호주는 만족한 눈빛이었으나 표정의 일그러짐을 감출 수는 없었다. 누가 보든지 산호주는 병세가 위독한 것만은 능히 알 수가 있었다. “영명사에 기거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사온데 제 집이 누추하기는 하오나 내일부터라도 옮기시지요.”
박생은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세상이 눈앞에 벌어지는 것을 느꼈다. 여자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나 누이동생까지도 사람 축에 들지 않는 것으로 여겨온 박생은 이제 산호주를 옆에 놓고서야 여자란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을 달리했다.
이렇게 해서 둘은 사랑으로 굳건히 맺어졌다. 그러나 얼마 후 산호주는 병으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산호주의 고향에는 그녀가 노후를 위해 사둔 전답이 많아 그곳에 산호주를 안장했다. 한식이나 추석이 되면 이름 없는 기생 산소에 일호주와 일병금을 들고 오는 박생, 백발이 휘날릴 때까지 거르지 않았고 해마다 두 번씩 찾아와서 산호주를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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