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後梁)나라 사람 왕언장(王彦章)은 병사부터 시작하여 양(後梁)의 태조에 의해 장군이 된 용장 이였다. 나라가 망하려면 인심은 흉흉해지고 추악한 권력싸움과 국정이 어지러워지는 법, 양(後梁)의 태조가 아들에게 죽고 그 아들은 동생에게 죽는 등 내분이 심해지자, 기회를 보고 있던 진왕(晉王) 이존욱(李存勖)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당(唐)이라 한 뒤 양나라를 침공하니, 최후까지 도성을 지키던 왕언장은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양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당나라 황제는 그의 용맹무쌍함과 충성심을 아껴 자신의 신하가 되어 달라고 하자 “아침에는 양나라를, 저녁에는 당나라를 섬긴다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겠느냐”며 기꺼이 죽음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왕언장은 생전에 글을 배우지 않아 거의 글자를 알지 못했으나 평소에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의미의 “표사유피 인사유명 (豹死留皮 人死留名)”을 즐겨 인용 했는바, 후일 누군가가 표(豹)자를 호(虎)자로 바꾸어 썼다고 전해진다.
짐승도 가죽을 남겨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더욱 훌륭한 일을 해서 후세에 좋은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교훈의 뜻이 담겨 있음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가문의 영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문을 중시했던 우리 조상들은 가문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냈으니 바로 전통과 가풍이다.
경주 최씨 가문에 400여 년 동안 9대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최부자집, 또는 최진사집으로 알려진 부자 집이 있다. 그 최씨집안에 아주 독특한 가풍과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벼슬을 하되 진사이상은 하지 못하게 하고, 만석이상으로 재산을 불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으며, 찾아오는 과객(過客)은 후히 대접해야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살 수 없도록 했다.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야 하고, 사방 100리 안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했으니 이러한 전통은 잘 지켜지며 내려와 후대에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온 훌륭한 전통이며, 복잡한 세상을 사는 우리가 깊이 음미하고 되짚어 보며 삶의 지표로 삼아 볼만큼 멋진 가풍이다. 불경에서 세상의 모든 생물체는 선악의 응보에 따라 여섯 개의 세계를 돌고 돈다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주장하면서, 인간의 일생은 찰나(刹那)이고 후생(後生)은 긴 것이라, 후생을 위해 살아있는 동안 좋은 업(業)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두 주먹 불끈 쥐어, 세상의 모든 것을 움켜잡으려고 바동거리며 살아 가다가, 나이가 들수록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법칙에 의해 켜켜이 쌓인 추억이나 들춰 보면서 차츰 세상과 멀어지게 되고, 급기야 극심한 고통 속에 빈손으로 모두와 이별하게 되는 것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의 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무엇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것이냐’다. 왕언장처럼 위대한 이름이야 남길 수 없겠지만 나름대로 무엇인가는 남기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맑은 물처럼 조용하고 깨끗한 인품을 유지하며 인생을 소중히 여기는 성숙함이 절절이 배어드는 삶. 약할 때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가지는 삶, 이러한 삶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실행하기 어려운 것은 틀림없고 자랑스럽게 ‘이렇게 살았노라’ 남기기도 얼굴 간지러워 어렵다.
시련과 고통의 세월을 힘겹게 헤치고 살아 왔듯, 그저 언제나처럼 공허한 마음을 내보일 수 있는 허물없는 친구와 온밤을 새우며 얘기하고 기분이 좋으면 헛기침하며 서러울 때 헛웃음으로 때울 수 있는, 자식이 서운하게하면 겉으로는 ‘괜찮아’ 하면서도 속으로는 화가 나는 평범한 사람, 그런 삶과 인생이라 한다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멋지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 초라하고 누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고, 삶에 쫓겨 종종걸음을 치지 않으며, 매일 맞이하는 아침이 새로워 하루가 밝고 찬란하게 느껴지는, 그리고 은근한 향기를 남기려는 마음과 모두를 가슴으로 깊이 사랑하는, 그런 삶이면 족할 것이며, 그러한 삶이 내 인생 끝낼 때 남겨서 좋은 것들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세월 지나 먼 훗날, 내 사랑하는 가족과 친인들이 아주 가끔이라도 추억하고 그리워해 준다면, 인생의 바다를 그래도 괜찮게 건너왔다는 자위(自慰)가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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