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 심희수는 선조 3년에 진사가 되고 2년 뒤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승의 자리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이러한 심희수의 출세가 있기까지는 한 여인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야기에 의하면 일타홍이라는 기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심희수는 과거는 물론 벼슬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심희수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글공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지내고 있었다. 남자다운 얼굴에 호탕한 성격을 가졌으나 가난하고 무식한 데다 잔칫집만 골라서 얻어먹고 다니는 일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고 살았으므로 동네 사람들은 심희수를 건달이나 비렁뱅이로 취급했다.
그날도 심희수는 권세 있는 집 잔치에 가서 온갖 눈총과 미움을 받으면서도 눌러앉아 얻어먹으면서 옆자리의 기생을 흘깃흘깃 훔쳐보고 있었다.
그때 심희수의 눈에 예쁜 기생의 얼굴이 들어왔으니, 그 가생의 이름은 일타홍이었다. 심희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그 곁에 앉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복인가, 그를 쳐다보는 기생 또한 싫지 않은 눈치였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맞추었고 일타홍은 변소에 가면서 심희수를 밖으로 불러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그의 귀에다 속삭였다.
“먼저 댁에 가 계시면 제가 곧 따르겠습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한 심희수는 그 길로 집 방에 가서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렸는데, 해개 채 지기도 전에 신발 소리를 내면서 일타홍이 들어왔다. 심희수는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일타홍은 차분한 어조로 그의 어머님부터 뵈어야 한다고 말하고 곧장 안방 문앞으로 달려가 문안 인사를 드린 뒤에 오늘 만난 사연을 숨김없이 실토하고 자기의 결심을 또박또박 분명하게 밝혔다.
“도련님의 남자답고 호협한 기상은 장래에 큰 인물이 될 기상이지만 만약 지금 그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훌륭한 기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마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저는 오늘부터 화류계에서 발을 씻고 도련님의 뒷바라지를 위해 저의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일타홍의 결의는 간절하고 다부졌다. 그녀의 열변은 계속되었다.
“마님! 저의요청은 욕을 채우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만의 하나라도 그런 목적이라면 어디에 사람이 없어 이렇게 가난한 과수댁의 자제를 유혹하겠습니까?”
일타홍은 다소곳이 심희수 어머니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 어머니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일타홍에게 말했다.
“우리 희수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제멋대로 자라다 보니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놀기만을 좋아해 허송세월하고 있단다. 저것을 그냥 두면 안 되겠다고 밤낮 걱정은 하지만 그것은 마음뿐이지, 무슨 다른 도리가 있겠느냐? 더구나 몸이 늙고 보니 귀찮은 생각만 들고 아무런 대책 없이 그저 그날그날 지나는데, 그래도 저놈이 복은 있나 보구나, 이런 예쁜 귀인이 제 발로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을 보면.”
잠깐 한숨을 돌리고 난 심희수의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너의 뜻은 가상하고 고맙다마는 이렇게 가난한 집구석에 와서 과연 네가 살아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더구나 잘 먹고 잘 입으며 놀기만 하던 네가 어떻게 고생을 견뎌낸단 말이냐?”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표정은 제발 좀 그렇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이 역력했다. 일타홍은 몇 번씩이나 다집했다.
결코 살다가 포기하고 가는 그런 일은 없을 꺼라고. 그날로 밀타홍은 심희수의 새색시가 되어 그 집 식구가 되었다.
심희수는 노수신의 문하가 되어 글공부를 시작했고 색시는 누구보다 무서운 학부형 노릇을 했다.
어쩌다가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무서운 감독자는 용남하지 않았다.
심희수는 참으로 부지런히 공부했다. 과거에 빨리 급제해야 예쁜 색시가 도망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늘 그를 채찍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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