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고 새 울어 녹음이 생동하는 계절 속에서 어울리지 않는 일임에도, 몇 차례의 부음(訃音)을 받고 나니 우울한 이야기일망정 풀어 놓아야할 필요를 느낀다.
젊어서는 눈앞에 다가온 급한 일도 아니며 먹고 살기 바빠서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고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지만 관조(觀照)의 세계에 들어가는 나이가 되면 한층 가까워진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불교에서 생사관(生死觀)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있는데 분단생사(分段生死)와 변역생사(變易生死)가 그것이다. 불경적(佛經的) 의미는 약간 다르다 해도 대략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분단생사는 보통사람들의 생사관(生死觀)을 말하는 것으로 생(生)의 세계와 사(死)의 세계를 따로 때어놓고 보는 것인데, 다음 세상에서의 행복한 삶과는 상관없이 현세의 미련에 집착하여 크나큰 고통 속에서 세상을 뜨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죽음의 길에 임하면 심리상태가 몇 개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 단계는 죽음을 부정하는 것으로 사실 자체를 믿지 않고 의사의 진단도 의심 속에 믿지 않는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은 다 아니고 왜 하필 내게 오는 것이냐며 분노하는 단계다. 세 번째는 신과 같은 절대자에게 의지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고, 이제라도 보다 착한 일을 한다면그 보상으로 생명이 연장 될 것이라는 타협의 단계다. 네 번째는 회복의 가망도 없고 종교의 힘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깊은 우울증에 빠지는 단계다. 마지막으로 거치는 단계가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다. 영적인 희망과 내세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도 있고 친인들과의 이해를 다지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분단생사를 거치는 범부들은 대개가 이와 같이 고통스러운 심리적 단계를 거쳐서 먼 여행을 떠난다.
그와 반대로 변역생사는 생과사의 세계가 떨어져 있지 않고, 죽음을 단지 다른 세상으로의 변화로 보는 생사관인데, 겨울을 계절의 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봄을 맞는 준비기간이라 믿는 것으로서, 종교의 내세관과 일맥상통하는바 있으며, 동양의 철인들과 지식층들이 자연의 여백이 새겨진 동양화를 즐기는 이유가 내세에 존재하는 기쁨과 여유로움을 인지하는 추상(抽象)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죽음과 삶의 연결은 바로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 속에 삶을 살아야 하고 삶의 의미 속에 죽음의 의미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모두 영원히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죽음자체를 삶속에 받아 들여야 하며, 피한다고 올 것이 안 오는 것이 아니라면 죽음을 친숙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삶을 이어가야 하고 유한(有限)의 삶 자체를 즐길 줄 알아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사관도 긴 인생여정을 거쳐 온 늙음 속의 이야기이지 젊은 사람의 경우는 절대로 아니다. 지인의 아들이 꽃다운 나이에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생노병사 윤회의 순서도 밟지 않고 요절 하였으니 더욱 안타깝고 아쉽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는데 평소 자식사랑이 극진했던 그분의 심정이야말로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고통과 슬픔으로 찢어질 것이라는 짐작에 대놓고 위로의 말조차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공명하는 아픔은 크다. 비록 지면일지라도 그분의 마음을 보듬고, 고인이 변역생사의 세계로 옮겨 갈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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