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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군에 있는, 전봉준 장군의 친딸이라고 주장한 전옥례 씨의 묘비와 석상, 70년 동아일보 기사(진안신문제공) |
고창출신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전봉준(全琫準) 장군의 친딸이라고 스스로 주장한 전옥례(全玉禮, 1880~1970년)씨의 묘소가, 전북 진안군 부귀면에 있다는 것이 진안신문의 발굴보도로 밝혀졌다.
진안신문(7월 19일자)의 기사는 1970년 동아일보 1월 8일자 신문내용(‘자칭 전(全) 장군 딸 옥녀(玉女)할머니 별세’)을 소개한 뒤,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내용과 198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고(故) 전옥례 씨의 비문 내용과의 차이점 등을 지적하며, 전봉준 장군의 외손자 고(故) 이희종(李熺踵) 씨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번 진안신문에서 발굴보도한 고(故) 전옥례 씨의 묘소는 그녀의 장손 이희종 씨에 의해 조성됐고, 진안면 부귀면 신정리 서판마을에 묘비와 석상과 함께 있다고 한다. 묘비의 내용은 전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 회장 최현식(崔玄植) 선생이 짓고, 전옥례 씨의 장녀 이순이(李順伊)와 장손 이희종 씨가 힘써 세웠다고 서술되어 있다.
동학 전문 연구자인 신순철 교수(원광대 사학과)는 “전봉준 장군 슬하에 2남 2녀가 있었다는 주장은 있지만, 공인된 내용은 아니다. 전봉준 장군의 혈육이라는 주장은 2건이 있었는데, 6~70년경에 스스로 전봉준 장군의 딸이라고 밝힌 할머니와 외손녀라고 밝힌 분이 있었다. 비록 입증된 사실은 아니지만, 실제 딸일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이미 70년대 동아일보 기사에서 다뤘던 전옥례 씨가 전봉준 장군의 딸이라는 주장은 새롭지 않으나, 그 분의 묘소가 진안군 부귀면에 있고, 묘비와 석상이 함께 세워져 있다는 사실은 새롭게 확인된 이야기다”라고 전했다.
고(故) 전옥례 씨 비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한글로 띄워쓰기해 전하면 다음과 같다.
“…(전략)…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천신만고 끝에 부도(婦道)를 다한 현부(賢婦)가 있으니 바로 천안(天安) 전씨(全氏) 옥례(玉禮) 여사이다. 여사는 1880년 고종(高宗) 경진(庚辰) 4월 8일 당시 태인현(泰仁縣) 산외면(山外面) 동곡(東谷)에서 민족의 선각자요 갑오혁명의 영도자인 전봉준 선생의 장녀로 태어나 8세에 조부모를 따라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양교리(陽橋里)로 이사하여 자랐다. 1894년 갑오혁명으로 말미암아 부모를 잃고, 천애(天涯)의 고아로 유리(流離)하다가 마이산(馬耳山) 금당사(金塘寺)에 들어가 김옥련(金玉蓮)으로 변성명(變姓名)하여 공양주(供養主)가 되었다. 그리고 23세에 부군(夫君) 경주(慶州) 이공(李公) 찬영(贊榮) 선생과 결혼하여 5남 2녀를 두고 현모양처로 부공(婦功)을 다함에 그 숙덕의행(淑德懿行)이 향린(鄕隣)에 떨쳤다. 물환성리(物換星移, 사물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감)하여 조국광복 후 1968년 무신(戊申)에 세인들이 녹두민요를 구가(謳歌, 칭송하여 노래함)하게 되자 비로서(비로소) 소종래(所從來, 지내온 내력)를 세상에 밝히니 어찌 놀랍고 장하지 않으리요. 또 황토현 기념탑을 참배하고 갑오동학혁명기념제전에 참석하여 내 이제 떳떳한 인생이 되었으니 칠십년의 유한(遺恨)이 풀렸도다 하고 1970년 기유(己酉) 11월 27일 별세하니 향년 91이요, 묘는 진안군 부귀면 신정리(新亭里) 산 사기정골에 안장되었다.…(후략)…. 1984년 갑자(甲子) 4월 15일, 전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 회장 최현식 찬(撰, 짓다)”
윤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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