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만하게 걸어가는 세월에 실려 바뀌고 바뀌는 계절 뒤편으로 그나마 낡아버린 인생의 임종을 본다.
언재부터인가 돈 달라 보채는 아이들도, ‘일찍 들어와라’ ‘술 좀 작작 마셔라...’ 어머니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아 열심히 지청구하던 마누라의 잔소리도 실종되어 버렸다.
주체 못할 만큼 남아서 귀찮은 시간과 뭘 해봐도 재미없는, 소통의 건더기조차 없이 먼지처럼 내려앉은 외로움뿐이다.
멀지 않은 옛날 5~60년대, 모든 사람들이 전쟁의 폐허 위에서 배가고프면 입술을 빨고 목이마르면 눈물을 삼키던 어려웠던 시절에도, 문밖을 나서면 대나무 말(馬)을 함께 탈 수 있는 친구가 있었고 길옆의 들꽃, 연못의 개구리, 실개천 송사리 떼까지 지천에 널려있던 놀이기구(?)가 있었으며 몸은 말랐어도 건강했고 가족이 옆에 있어 더 없이 행복했었다.
어린 시절을 보낸 뒤로 삶에 찌들었던 세월을 돌아보면, 중용(中庸)의 슬기로움은 잊은 채 흑백논리에 젖어 좋아하든가 증오하든가 하거나, 온갖 작태를 연출하면서 자신을 오염시키든가 하면서, 때로는 사랑에 가슴앓이도 하고 충동적이며 참을성 없이 건성건성 살아오다가, 황혼 속에 이재사 상실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자승자박이라고 생각되어 후회한다.
조그마한 별에서 장미 한 그루와 살던 [어린왕자]는 아름답지만 오만한 장미를 깨우치고자 여러 별을 여행하게 된다.
여행 중에 권위에 찌든 사람, 허영심이 많은 사람,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는 사람, 헛된 소유욕에 몰입한 사람 등 잘못된 가치관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나서야 “진실한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야 하고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여 둘만의 역사를 쌓아야 하며 이런 것들이 모여 완벽한 세상이 되는 것”임을 알게 되어, 소중한 장미가 기다리는 자기별로 돌아간다. 적지 않은 풍상을 겪고 살아왔지만 [어린왕자]의 “내 주위와의 관계를 아끼고 사랑해야한다”는 작은 깨달음조차 얻지 못한 채 스스로 영어(囹圄)의 성에 빠져서 보내버린 시간들이 어찌 후회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을 살다보면 회한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련한 추억도, 무지갯빛 꿈도, 즐겁고 아름다웠던 일들도 많았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주마등같은 숱한 기억 중에 좋은 일은 다 잊어버리고 나쁜 일 괴로웠던 일만 선명히 새로워지는 것은 참 묘한 현상이다.
인간의 삶이 끊임없는 발전을 추구함으로써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것은 당연하다. 설령 인생의 종착역이 가까워 졌다 해도 오늘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라 믿는다. 어차피 끝을 향한 마지막 열차를 타고 달리고 있는데 구태여 고독에 목매달고 체념으로 얼룩진 삶을 사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자아의 가치를 위해 의식을 일깨우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북돋아 남은 삶 아름답게 꽃피워 봐야 하지 않을까? 보다 당당하고 화려하게. 선글라스 끼고 청바지도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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