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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 송태희(위) 박종석 화백 작품(좌) |
한말 서화가로 ‘호남화단의 마지막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로 불리는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1872~1941) 선생의 삶과 예술을 조명한 특별한 전시회가 열린다.
오는 10월 1일(금)~6일(월) 고창문화의전당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박종석 화가의 초대 작가전 ‘세한(歲寒)을 기약하고’. 한국화가 박종석(54) 씨는 최근 염재 선생의 삶을 기록한 <세한을 기약하고>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염재 송태회 선생은 한국 추상화의 대가인 고암 이응로(1904~1989)의 첫 스승으로 호남 화단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근대회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위창 오세창과 매천 황현, 근촌 백관수 등 일제 식민지 시절 우국지사와 함께 독립정신을 높인 인물이었지만, 그동안 선생에 대한 구체적인 조명은 전혀 없다시피 했다.
이 전시회는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교육과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한 재야 작가의 투혼을 담아내고 있다. 박종석 화백은 “기묘사화(1519년) 때 조광조 선생의 시신을 염했던 학포 양팽손 선생의 논문을 대학원 때 쓰면서 호남화단의 뿌리에 관심을 느껴 재야 예술인들을 조명하게 됐다”며 “한국 근대화단의 큰 인물이지만 제대로 된 논문 하나 없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이어 “서화가로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국권을 상실했을 때 민족교육과 예술로써 나라의 정기를 세우려는 불굴의 의지를 뒤늦게나마 조명할 수 있어 의미가 깊다”고 소회를 밝혔다.
염재 송태회 선생은 화순군에서 태어나 1888년 16세에 동몽진사, 1900년 박사시(博士試)를 거쳐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일제가 침략하자 벼슬을 접고 시·서·화에 전념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중국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귀국, 1908∼1910년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약했다. 1918년 오산고보(吾山高普)에 초빙돼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는데, 이 학교는 고창고보로 개칭된 후에도 민족교육적 학풍 때문에 타지방의 뜻있는 학도들이 많이 전입해 와 학생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고창고보는 3·1독립정신을 계승한 민족교육의 전당이며, 5천여 군민들이 십시일반 재단기금을 내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명문교육의 요람이었다.
염재 선생은 ‘성산기’, ‘성산별양군서’ 등 고창과 관련된 명문도 많이 남겼다. 선생의 행적과 학문,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염재문집(念齋文集)> 7권 3책(미간행 필사본)이 남아있다.
박종석 화백은 광주 출생으로 조선대 순수미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개인전 11회, 단체전 29회를 가졌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동아미전 입선 등의 경력이 있다.
김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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