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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 김경식
연정교육문화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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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천주교 공원묘지에 너를 눕혀두고 떠나올 때 내 심정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지를 몰랐다. 지금도 이 공허하고 외로운 마음 그 누가 다 알 것이냐. 그날 저녁 7시에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 영위에 네가 떠난 그 엄청난 사실을 차마 고할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다 알고 계실 것으로 믿고 있다. 고 하지 않았다고 꾸중하신다면 그건 내 책임이니 달게 받겠다.
오호애제(嗚呼愛弟)라, 명식(明植)아. 집안은 물론 타인들에게도 좋은 일만 했고, 네 70평생 그렇게 건강하고 등산에도 지치지 않던 강인한 네가 왜 1년여를 병마에 시달렸고 끝내는 명을 달리했는지 우리 속세 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지난 달 15일 네 집에서 우리 형제들 모여 점심했던 그 시간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네가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마지막 모임인 것 같다. 너는 그 때 “형님께는 죄송스럽고, 너희 동생들에게는 미안하다만은…”이란 말을 시작으로 유언을 남겼다. 내가 그 때 말했지 않았나? 우리 인간은 아무리 강하더라도 천명(天命)과 시운(時運)을 피할 수 있는 재간이 없다. 그런데 네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도 역시 천명에 따른 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너는 천주님의 뜻이라 하겠지만 다 그 말이 그 말 아니냐.
오호애재라, 명식아! 죽음, 그것은 천명에 따른다지만 나는 그것은 손바닥 한번 뒤집는 것 같은 것으로 시공(時空)속에서 다만 자기의 위치를 변동한 것으로 본다. 그건 우리 인간은 내가 있는 곳이 항상 내가 있는 나의 위치 아니냐. 유구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1만년도 찰나에 불과한데 그의 백분의 일인 백년도 못 되는 세월 속에서 생(生)과 사(死)라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 다만 우리는 시공의 위치를 바꿀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관계 속에서 살아있던, 죽어가던 영연한 시공 속에서 같이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니냐? 그저 명칭이 산 사람, 죽은 사람일 뿐이다. 그러기에 나와 너는 항상 영원한 시공 속에 같이 존재하는 것 아니냐. 내가 공허하고 외로운 마음을 갖는 것은, 네가 나와 같이 있던 위치에서 단지 저쪽으로 위치 변동하였을 뿐인 걸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형의 소견이 좁기 때문이다.
오호애제라, 명식아! 오늘이 삼우제(三虞祭)로구나. 지금으로서 이 형은 네가 있는 위치까지 갈 수 없으니, 그저 너와 같이 있었던 70년의 시공 속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광복 직후 할아버지 따라 왕등도로 이사해 몇 개월간 생활하던 일, 6·25 사변 때 서울에서 15일 걸어서 집으로 피란 오던 일 등에서부터 어머니 상 때까지의 일까지 모두가 너와 같이 앨범 속의 사진을 보는 듯하구나. 최근의 일에서 어찌 한 두 가지만 있겠느냐만 다만 두 가지를 참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하나는 어머니 떠나신 후에 네가 떠났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너는 병석에 누어있으면서도 9월 초순까지 전화로 2~3일에 한번씩 “형님, 오늘은 맥박이 몇 번 뛰어요, 하루에 3번씩 꼭 맥박 체크 하세요. 맥박이 50은 넘어야 해요”라며 이 형의 건강을 챙기던 그 일이다.
오호애제라, 명식아. 너의 위치를 변경하고 불편한 것은 없느냐. 어머니는 물론이고 선영께 네 위치 변동을 고했느냐. 가끔 찾아뵈어라. 지금은 당분간 편히 쉬고, 그 곳도 태산준령이 있을 것이니 네 즐기는 등산도 하여라. 절대 무리는 마라. 나도 언젠가는 네가 있는 곳으로 가겠으나 그 시기는 천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 내가 너 있는 곳에 가면 물이 되어 만나겠다. 네가 떠나던 그날 2시간 전 병상에서 의식이 없던 네가 이 형이 왔으니 눈 좀 떠보라는 말에 눈을 반쯤 뜨며 눈물 흘리며 다시 눈을 감던 그 때 그 모습은 내 가슴 속에 영원히 묻어 두겠다. 편히 쉬어라, 오호애제라.
단기 4343년 10월 7일 큰형 연정(淵亭) 곡하다.
※1년여 동안 병고에 시달리다 지난 10월 3일 작고한 김명식 씨(김경식 소장의 7남 1녀 형제자매 중 첫째 동생. 70세, 전 정읍 정형외과 원장, 고창읍 도산리 출생)의 삼우제에 쓴 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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