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정월대보름에 진행하던 오거리당산제가 올해(2월 17일)는 구제역과 조류독감 때문에 축소된 당산제 형태로 치러졌다. 고창읍에 거주하는 이병열 박사(지리학)에게 의뢰해 오거리당산의 유래, 특징 등을 연속기획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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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거리당산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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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거리 할아버지 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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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거리, 노동천과 월산천의 합수로 범람 잦아 상거리는 조선조말 방장산 아래 마을인 천북동(川北洞)일대를 말한다. 상거리 당목이 있었던 천북동은 본래 천남면 동산리에 속해 있던 강변 땅이어서 조선중기까지도 인가가 없던 곳이다. 이곳은 노동천과 월산천의 물이 합수하는 지점으로 잦은 범람으로 치수사업이 어려워 마을이 설수 없었던 동산물의 황무지였으나, 조선후기부터 치수사업이 잘 되어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많아져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지형은 홍수에 의한 범람의 위험이 있는 곳이다. 마을 유래는 1950년대 후반에 읍사무소에서 조급하게 지은 이름이다. 천북동의 위치를 봐서도 분명히 천남면의 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천남동이라 불러야 옳은데 지금까지 천북동 그대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주변의 새주소는 천변남로로 기재하고 있어, 그 본이름을 찾았다.
지도상에서 확인한 바로는 월산천이 당산 정면으로 공격하여 물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월산천의 물을 남쪽으로 돌렸다가 다시 북쪽으로 흐르도록 돌린 흔적이 보인다. 이렇게 물을 돌림으로써 당산과 천북동은 월산천의 직접적인 공격으로부터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천북동은 불리한 수계뿐만 아니라 고창읍성의 남쪽에서 뻗은 기맥과 북동쪽의 방장산의 기맥이 양쪽에서 뻗어와 좁은 수구를 만들어 물이 완만하게 빠져 나갈 수 없다.
이 수구 밖으로 물이 빠르게 빠져 나가 형성된 지형에 입지한 마을이 현재의 모양동과 천북동이다. 두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는 합간정(合澗亭)과 임간정(臨澗亭)이라는 정자도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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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거리 할머니 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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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할머니·아들은 자연석, 며느리는 당목(堂木) 상거리 당산은 원래 동부리(東部里)로 불렀으며, 이곳에는 신체가 자연석인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 그리고 아들 당산이 남아 있고, 신체가 당목(堂木)인 며느리 당산은 할머니 당산 옆에 남아 있다. 이의 명칭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나 이 글에서는 고창오거리당산제보존회와 전 문화원장 이기화선생의 주장을 따른다. 그리고 ‘동산물 숲쟁이’ 또는 ‘동부리 당숲거리’라는 이름도 남아 있다. 옛 고창읍내의 끝인 상거리의 당숲거리는 사라지고 입석들과 최근에 심은 느티나무 2그루와 1그루의 오래된 팽나무가 남아 있다. 할아버지 당산은 수북동의 작은 동산 끝부분에 높이 184cm, 넓이 75cm의 자연입석이 신체로 있으며, 주변에는 최근에 심어진 것으로 확인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할아버지 당산은 40도 방향의 동동북을 바라보고 있다. 이 방향은 고창의 진산인 방장산의 최고봉 옆의 낮은 봉우리다. 이는 할아버지 당산이 누군가에 의해 이동한 결과라 생각한다. 왜냐면, 당산은 풍수적 의미로 안산에 해당하는 기능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위적으로 안산을 당산으로 조성할 때는 안산이 진산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상거리 할아버지 당산이 이렇게 진산인 방장산의 최고봉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봉우리를 바라본다는 것은 모순이 된다. 따라서 상거리의 할아버지 당산은 지금의 위치에서 방향을 방장산의 최고봉을 바라보도록 맞추어야 한다. 지역의 고로들에 의하면 새마을사업을 할 때 손을 댄 것 같다고 한다.
할머니 당산은 할아버지 당산의 정동방향으로 약 18m쯤 떨어진 천북동 18번지(동산5길 27번지)의 집안에 높이 195cm, 넓이 95cm의 자연입석이다. 할머니 당산은 정북을 바라보며 세워져 있다. 며느리 당산은 할머니 당산의 바로 옆에 있는 약 300년 된 팽나무다.
아들 당산은 모양동 167번지 대로변에 세워져 있는데, 할아버지 당산을 바라봤을 때 정동방향으로 세워져 있다. 당산의 방향은 정북을 향해 세워져 있으며, 할아버지 당산과의 거리는 약 330m정도 떨어져 있다. 현재 아들 당산의 크기는 확인할 수가 없다. 왜냐면 당산의 2/3가 주변이 높아지면서 묻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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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거리 아들 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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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거리 며느리 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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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거리의 당산은 수구막(水口幕) 상거리의 당산은 수구막(水口幕)이었다. 수구는 풍수지리에서 골짜기의 물이 빠져 나가는 곳을 말하는데, 좋은 수구는 물의 흐름이 보이지 않도록 멀리 돌아 흘러 하류가 보이지 아니하여야 형세가 좋다. 이는 수구를 통해 지기가 빠져나간다는 선조들의 믿음이 만들어 낸 결과가 수구막이다. 상거리는 고창읍내의 뒷부분이기 때문에 수구막이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풍수의 논리는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 논리다. 즉 고창천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는 수구막이가 아니지만, 천북동의 동쪽에 있는 월산리, 월곡리, 석정리의 입장에서는 수구막이가 된다.
한편 상거리에는 마을과 당을 보호하기 위해 숲을 조성하여 제방을 대신하였다. 숲은 할아버지 당산 앞에서부터 천변을 따라 나무가 조성되었다. 고로들에 의하면, 과거에 숲쟁이 부근에서 팽이버섯을 채취하고, 나무로 숯을 만들었고, 괴목이 있었다고 한다. 숯의 재료는 재질이 단단한 나무가 사용되는데, 주로 갈참나무·굴참나무와 같은 참나무류가 사용된다. 예를 들면, 금강 범람원지대의 촌락과 경지 주변에는 방수림과 방풍림으로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등의 숲을 조성하였다. 조선후기 익찬(翊贊) 황윤석(黃胤錫)이 합간정에서 읊은 시에 ‘城角山回扚籬根水落沙梁魚大小味塊月淺深波’이 있다. 해석하면 ‘성곽모서리산은 외나무다리 둘러가고, 울타리 밑을 흐르는 물은 모래에 떨어지네. 어량으로 잡은 고기 크고 작은 그 맛은, 홰나무 달 비친 얕고 깊은 물에서라’이다. 합간정 주변에 홰나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볼 때 상거리 숲쟁이의 수종은 참나무류, 팽나무, 느티나무, 밤나무, 홰나무(회화나무) 등의 잡목으로 추정된다.
한편 원래의 상거리 당산은 산신제로 추정하고 있다. 당산은 마을을 지키는 철륭으로 모신다고하고, 철륭 흙을 건드리지 못한다고 한다. 철륭의 신체는 쌀을 독에 넣어 모신다고 한다. 이 철륭이 터줏대감인 철륜대감(鐵輪大監)에서 온 것인지 물을 관장한다는 천룡신(天龍神)으로 표기해야하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다만 마을사람들은 마을과 개인의 수호신으로 믿었다고 한다. 한편 상거리 당산은 고창의 해가 떠오르는 곳으로, 서방으로 불리는 동녘에 위치해 있으며, 고창의 동쪽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제는 정월초 하룻밤에 지낸다.
이병열(백강전쟁기념사업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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