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정월대보름에 진행하던 오거리당산제가 올해(2월 17일)는 구제역과 조류독감 때문에 축소된 당산제 형태로 치러졌다. 고창읍에 거주하는 이병열 박사(지리학)에게 의뢰해 오거리당산의 유래, 특징 등을 연속기획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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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리 당산의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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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사무소와 고창군립미술관 사이에 있는 중앙 당산은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이 있다. 당산안내판에 중앙 당산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고로들이 있다. 그 이유는 중앙동이라는 지명이 1950년대 후반에 나왔기 때문에 중앙 당산이라는 것은 원래의 명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리 당산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견해이다. 본고에서도 고창군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사용하고 있는 중앙 당산보다는 어원적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는 중리 당산으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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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리 당산의 할아버지 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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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리 당산은 오방 중 가운데인 중방 중리 당산은 구읍(舊邑)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으며, 고창의 오방 중 가운데에 자리한 곳으로 오방사상의 개념에서는 중리가 중심이다. 중리 당산은 옛 고창현의 주요한 시설이 있었던 고창읍성 앞에 자리 잡고 있다. 중리 당산이 위치한 고창천 주변은 늘 홍수에 의한 범람이 반복되던 곳이다. 당산은 고창읍성과 성산의 기맥이 마주하여 보는 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중리 당산은 예전 매일시장과 극장이 있었던 부근에 있다. 이곳은 구 매일시장의 주요한 통로인 골목길로 과거 동리정사(현재 신재효 선생 고택보다 훨씬 중앙동 일대의3천~4천평의 생활공동체 터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고창읍성 방향의 땅이 동리 신재효 생가 터다. 동리가의 대문 앞 부근에 중리 당산이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다). 현재 반룡교와 고창교 사이의 골목길에 높이 382cm의 할아버지 당산이 있으며, 정동방향으로 약 67m 떨어진 곳인 고창교 부근에 있는 팽나무가 할머니 당산이다. 아들과 며느리 당산은 고창군립미술관 앞의 매일시장 입구로 동리 신재효의 정문 부근에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
전 고창문화원장 이기화 선생에 의하면, 1950년대 말 매일시장이 생기고 소방서가 들어오면서 당시 소방대장의 지시로 소방서 대원들이 아들과 며느리 당산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할머니 당산에서 서쪽의 반룡교 부근 천변에는 ‘당숲거리’라는 지명이 있었다. 이 당숲거리는 중리 당산 주변의 고창천변을 따라 고창교에서 조양회관까지다. 중리 당산의 당숲은 나무를 심어 하천의 제방 역할과 당산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중리 당산은 1790년 전라도 일대의 홍수 피해로 고을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고창의 아전들이 화주(化主)를 자청하여 고창 읍내의 중리에 1803년 2월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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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리 당산의 할머니 당산(팽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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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리 당산은 삿갓모양이 미륵과 닮은 미륵당산 한편 중리 당산은 당간의 삿갓모양을 미륵과 닮은 모습이라 하여 미륵당산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오거리당산 모두가 미륵신앙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초기 설립 시기는 미륵신앙이라기보다는 산신제와 같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다가 조선조말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고단한 삶이 연속되자 민중구원의 염원을 기원하는 미륵신앙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중리당산의 할아버지당의 서쪽 석간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가경(嘉慶)은 가경제(嘉慶帝)를 말한다. 그는 중국 청(淸)나라 제7대 황제(재위 1796~1820년)로 즉위 후에도 태상황제가 된 건륭제가 실질적으로 통치하였고 태상황제의 사망 후에야 친정을 폈다. 가경제가 1796년에 청의 황제가 되었으니, 가경 8년은 1803년이 된다. 다음의 명문에 대해 많은 이견이 있다. 이견은 아래 표를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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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중인 중리 당산의 할아버지 당산 명문(새긴 글). |
명문의 해석과 견해 차에 대한 학술연구 필요 전라금석학연구회의 김진돈 회장에 의하면, 처음 새긴 것은 嘉慶八年癸亥閏二月初十日과 化主 魯貴連 金聖澤 車道旭 車道平 申光得이고, 약간의 시간을 두고 施主 金陽鳳 李明得을 추가 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段慶哲의 앞 음각을 筆(필)로 보고 은경철이 새긴 것이라 한다. 이것은 처음 새긴 글씨와 나중에 새긴 필획이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동시대의 인물로 가름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나중에 다시 施主 2명을 추가하면서 筆자도 같이 추가했다고 추정하였다. 筆(필)자는 書(서)와 같은 뜻으로 이 지역에 사는 은경철이 글씨를 썼다고 주장하였다. 추가한 글씨는 다만 深刻(깊이 새기다)을 하지 못한 관계로 書자인 은경철 부분은 약간의 돌이 마모되어 판독하기가 힘들다는 의견이다. 은경철에 대해 이기화 선생은 은경철이라는 사람이 행주은씨(幸州殷氏)로 족보를 찾아 설명하였다. 은경철은 그의 4대손인 은두표(殷斗杓)가 증언해주었다고 한다. 은경철은 자손을 얻기 위하여 중리 당산의 화주를 하였으며, 중리 당산에 치성한 결과 얻은 이가 영규(英珪)라 하였다. 화주인 은경철의 자손은 4대손인 은두표까지 독자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은두표가 아들 둘을 낳았다. 은두표 내외는 중리 당산에 굿도 하고 시루도 올려놓고 정성을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중리 당산을 빛냈기 때문에 은경철의 앞 명문을 華[빛날 화]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시주에 보이는 인물인 신광득은 동리 신재효의 아버지로 추정된다. 그러나 족보를 확인해 본 결과 동리가의 집안에는 나오지 않은 인물이다. 동리선생의 부친인 신광흡(申光洽)은 고창현의 경주인(京主人, 중앙과 지방 관아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기 위해 지방 수령이 서울에 파견하던 아전 또는 향리)을 하면서 1810년 이전까지 서울에 살았다. 신광흡은 경주인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번 것을 계기로 여러 가지 전재(錢財)의 화주나 시주를 통한 인연으로, 1810년 고창고을의 관약방(官藥房)을 맡게 되면서 고창으로 입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광득을 신재효의 아버지인 신광흡으로 추정해도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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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중거리 당산에서 지내던 고창 오거리 당산제가 올 2월 17일(정월대보름 날) 근래 처음으로 중리당산에서 진행됐다. |
중리당산은 중거리와 하거리 당산 조성과 같은 1803년이나, 중리 당산이 오방의 가운데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위의 두 당산보다 1개월 앞선 1803년 2월에 세웠다. 중리 당산의 사각형 입석 면은 동서남북의 방위를 정확하게 측정하여 세웠다.
이병열(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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