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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 김경식 연정교육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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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 향리의 주민자치교화단체…4가지 덕목 흔히들 향약(鄕約)하면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규, 환난상휼 등 네 가지 덕목이라고만 알고 있다. 반쪽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향약의 의미에는 2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유교윤리의 기초 위에서 유반층(儒班層)이 주도하여 지방민의 교화(敎化)와 상부상조의 협동정신을 생활화하기 위하여 만든 향리의 주민 자치의 교화단체라는 것이며, 또 하나의 의미는 이러한 단체가 내걸고 있는 강령을 일컫고 있다. 앞에 든 네 가지 덕목은 실은 4대 강령의 제목이다. 어느 향약의 강령이든 하나의 덕목 제목 하에 20~30여개의 세분화된 행동 지침이 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하나의 사회·교화적 그리고 상부상조의 정신을, 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훌륭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그 동안 학계에서 연구는 미진한 편이었다. 향약에 관한 최초의 박사학위는 정치학 분야에서 서기 1979년의 일이며, 두 번째 경우는 서기 1981년 필자의 석사학위 논문 「율곡의 향약과 사회교육사상」과 서기 1987년 박사학위논문 「조선조 향약에 관한 사회 교화적 인식에 관한 연구」로, 이것은 교육학계에서는 향약에 관한 최초의 학위논문이다. 필자는 동 논문에서 앞에서 말한 향약의 정의를 비롯해, 유교사회와 향약의 관계, 향약의 전개과정에 대한 기존 학설을 비판하고 실증자료에 의거 새로운 의견을 제기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향약, 윤리·교육적 협동조직체…계, 기능적 협동조직체 전통적 동양사회에서 대표적인 협동조직은 향약과 계(契)이다. 향약은 원래 중국제로 윤리·교육적 측면에 중점을 둔 협동조직체요, 계는 순수한 한국제로 기능적 측면에 중점을 둔 협동조직체이다. 계는 2인 이상이 상부상조의 정신에 입각하여 일반생활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상호 결합된 기능적 협동조직체이다. 그러기에 외래적인 향약이 우리나라에서 발전 과정 중, 향약계로 발전하여 우리 문화에 내면화하였다. 향약은 중국에서 북송 말기 협서성 람전현에서 여(呂)씨 4형제가 서기 1016년에 향리의 주민을 교화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것이 그 시초이나,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그 뒤 1백년을 지나 주자(朱子)의 ‘증손여씨향약’이후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식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대체적으로 고려 말, 조선 초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에서 최초의 향약 실시는 지금까지도 중종 대(중종 12년, 서기 1517년) 함양 출신 유생 김인범(金仁範)이 주자 ‘증손여씨향약’을 실시하자는 상소를 함에 따라, 조광조 등의 사림파가 건의하게 된다. 이후, 수개월간의 논의 끝에 전국적인 강제 실시가 아니라 지방정부가 임의적으로 실시한다는 원칙하에, 우선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최초로 향약을 실시하게 되었고, 그 뒤 퇴계와 율곡에 의해서 발전되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며, 현재 시중에 출간되어 있는 국사책에는 다 그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향약의 4대 강령만을 의식하여 논의하고 있으며, 정부에서 향약의 실시를 논의한 것은 민간 자치단체의 강령을 정부 차원에서 인식하여 논의했다는 것인바, 이러한 입장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사항이다. 필자는 석·박사학위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논증하여 우리나라 향약의 발전과정을 새롭게 구축하였다. 그리하여 필자의 견해에 따라 논의하고자 한다.
최초의 향약 실시…1475년, 정읍 칠보에서 향약이 최초로 조직·실시된 것은 성종 6년(서기 1475년) 정극인(丁克仁)이 전북 태인현 고현내(古縣內, 지금의 정읍시 칠보, 태인면 일원) 지방에서 향리의 지방민 교화와 화목을 위해 입약(立約)하여 실시되었다. 이는 지금도 그 유제(遺制)가 일부 이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연유에서인지 조선시대 호남의 3대 명촌으로 고현내와 영암의 구림, 나주의 금성이 지목되어 왔던바, 이들 지역의 공통점은 향약이 발달되었던 지역이고 보면 우연한 일은 아니다(이것은 중종 12년, 서기 1517년에 향약의 강령을 반포·실시한다는 정부의 논의에 비해 42년이나 앞선 일이다).
그 뒤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와 같이 중종 대에 이르러 중앙정부가 그 실시에 대해 논의하기 이르러, 향약의 실시(향약 강령)는 이미 소학(小學)에 소개되어 있으니 전국적인 차원에서 강제적인 실시는 필요없고 다만 지방정부 차원에서 실시하라는 권고가 있어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향약의 강령을 인쇄하여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일반적인 견해는 이황의 이른바 퇴계향약, 이이의 이른바 율곡향약을 거쳐 향약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향약…율곡에 이르러 향약계로 발전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는 향약에서 4대강령의 실천만을 의식한 것이며, 조직적인 것을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일반적인 견해의 결정적인 잘못된 인식이 있다. 향약의 올바른 인식은 그의 조직과 그 위에서 실천 강령을 인식해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황의 향약도 향약의 조직은 실재 없었고, 다만 향약의 조직과 그 강령에 대하여 자기의 독특한 내용을 초안 했을 뿐이었다. 다만 그의 향약은 그 후 학통을 이은 영남학파들의 향약 조직에 준거가 되었을 뿐이다. 율곡에 이르러서는 향약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실시하기에 이르렀고, 특히나 향약계(鄕約契)로 발전하였다. 이런 점에서 외래적인 중국의 향약이 우리의 전통적인 계의 형식으로 움직여 비로소 향약이 우리 전통문화에 내면화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율곡에 이르러 조선적 향약의 성립에 이르렀고 그 뒤 대개 향약은 향약계로 실현되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말한 고현내 향약도 그 발전과정에서 향약계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고현내 향약이야말로 우리나라 향약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향약의 발전과정에서 우리가 주시할 것은 유형원(柳馨遠, 실학자)으로, 17세기 중엽 현 부안군 보안면에 위치한 우반동에서 실학자로서, 향약의 전국화로 사회교화의 광역화를 주장했다는 점이다. 지역적으로 보아 우반동이 향약이 최초로 조직·실시된 고현내와는 인근의 거리이고 보면 유형원은 이미 고현내 향약의 실시에서 사회교화의 실천의 중요성을 직접 체험·인식했을 것이라는 것을 추론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다음 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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