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대의 끝자락 상도솔을 깍아세운 칠송태(七松台) 암벽에 백제 위덕왕때 부처님의 신명을 받들어 검단선사가 벽장식 돔을 새겨 대도를 깨친 부처님을 부조(浮彫)하려던 꿈이 백제가 망하는 억지 수레바퀴에 끼면서 고려조에 중생제도의 독실한 민중신앙의식의 바탕은 장차 미륵보살이 부처님이 되어 속세를 제도할 때를 기다리며 머무른다는 지장신앙의 중심도량으로 큰탈없이 즈믄해를 버텨온 민족신앙의 원천이며 상징이 되었어라.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장엄한 마애불은 투박한 부조로 연화좌대위에 결과부좌한 모습 얼굴은 눈꼬리가 치켜올려 부치면서도 엷은 미소를 머금고 눈사이에 우뚝솟은 코, 삐죽이 내민 입술등이 대체적으로 거칠고 소박한 느낌이다. 두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고려 마애불의 평범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목에는 가느다란 삼도영락이 걸쳐있으나 지나치게 짧게 드리워져 있고 머리와 어깨가 거의 맞붙어 잔뜩 웅크린듯한 인상이다. 선으로만 걸쳐진 통견의(通肩衣)의 주름은 가슴을 밋밋하게 상징시켰으나 옷주름의 띠매듭으로 다듬어 놓았다. 수인(手印)은 두손을 활짝 펴 아랫배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는데 발과 더불어 과분하게 표현된 느낌이고 대좌는 2단으로 여몄으며 상단에는 옷자락이 늘어지고 하단에는 간략한 복연화문을 새겼다. 마애불의 머리위로 7개의 사각구멍이 뚫린 자욱은 목조의 전각을 지붕처럼 매달은 흔적이 완연하다. 전체적으로 세련된 기법은 아니며 공드린 흔적은 없으나 부조자체가 매우 상징적인 면면이 역력하다. 그 어려웠던 세월에 거대한 암벽에 불상을 새긴다는 것은 오직 돈독한 불심과 고뇌가 없이는 상상조차 할수 있겠는가! 이는 정녕 1500년전 백제인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기화(고창지역학연구소장) 고창문화원장을 역임한 이기화 소장이 고창의 지명과 관련된 향토서사시를 격주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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