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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불만족에 관한 추억
나카무라 기자 / 입력 : 2011년 06월 14일(화) 10:59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장성규라는 편집자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장애인은 뭐니뭐니해도 오토다케 히로타다 씨일 것이다. 1998년에 출판된 <오체불만족>은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9년에는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크게 히트하기도 했다.
이 책을 한국에 가져온 사람은 당시 창해출판사의 장성규라는 편집자이다. 그는 일본에 출장 갔을 때, 서점에서 <오체불만족>의 겉표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건 한국에서도 사회현상이 될 만한 책이다!’ 그렇게 확신한 장성규 씨는 바로 일본출판사와 교섭을 시작해 성공적으로 판권을 획득했다. 일본서적의 번역이며, 장애인을 소재로 삼아 인기를 얻기가 어려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오체불만족>은 한국에서도 ‘읽어야 하는 책’이 되었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장성규 씨는 필자의 대학원 후배이다. 석·박사 과정 모두 다 필자가 1년 먼저 입학했다. 당시 충남 공주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장성규 씨 부부랑 잘 지냈다. 2쌍의 부부 4명이 다 석·박사 과정의 대학원생이었다. 가장 먼저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우리 신랑이었던가.


   
오토다케 씨가 쓴 <오체 불만족>의 한글 번역본. 고 장성규 씨가 기획·편집·홍보 등 책의 출판을 담당했다
<오체불만족> 출판에 관한 이야기
지난 해 4월 말이었다. 장성규 씨 부부가 고창을 찾아왔다. 장성규 씨는 재작년 많은 고생을 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취득까지 벌어졌던 힘든 이야기나 출판사 근무시절의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오체불만족> 출판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출판 직후는 전혀 판매가 안 되었던 이야기, 어떻게든 사람의 눈을 이끌게끔 열심히 광고문구를 생각했던 이야기, 매주 다른 문구를 머리에서 짜내 자비로 신문광고를 했던 이야기, 갑자기 판매가 잘 되기 시작해 주문 전화가 폭발적으로 왔다는 이야기, 책의 재고가 부족해 밀려오는 주문에 대응할 수 없게 되자 어쩔수없이 사무실 문 잠그고 모든 사원들이 함께 술 마시러 갔던 이야기, 한국에 온 오토다케 씨를 김포공항에 마중하러 나갔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기자들이 밀려와서 쩔쩔맸던 이야기 등등, 술의 도움을 받아서 그랬는지 그날 밤의 장성규 씨는 특히 다변(多辯)이었다. 새벽 2시까지 놀다가 장성규 씨 부부는 공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장성규 씨의 갑작스런 죽음
그 다음날 저녁이었다. 필자는 가족이랑 고창읍성에 산책하러 갔다. 그때 신랑 핸드폰이 울렸다. 장성규 씨 부인에게서 온 것이었다. 신랑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장성규 씨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고….”

우리는 공주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미망인은 힘이 빠진 얼굴로, 그러나 장례손님에게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 옆의 두 딸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울기만 했다.

장례식장을 떠나 고창 집에 도착한 필자는 바로 일본의 오토다케 씨에게 연락했다.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오토다케 씨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일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다. 필자는 생각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의 소속사나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사무실의 메일을 확인하고 난 뒤, 사무실로 메일을 보내 오토다케 씨에게 연결해달라고 부탁했다.

장성규 씨의 딸들은 편집자 시절의 아버지의 활약을 모른다. 앞으로 아버지 없이 살아가야 하는 딸들에게, 아버지가 자긍심을 갖고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과 그 빛나는 결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오토다케 씨가 장례식장으로 조화(弔花)나 조전(弔電)을 보내주었으면 했다. 물론 전날에 필자가 들었던 이야기, 장성규 씨가 한국판 오체불만족 출판에 많은 고생을 했던 이야기를 붙여서 메일을 보냈다. 장례식이 끝난 며칠 후, 오토다케 씨는 애도의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오토다케 씨가 보낸 메시지
<오체불만족>이 사랑하는 이웃나라인 한국에 소개되고 널리 받아 들여져, 많은 한국 분들이 제 메시지를 받아주신 것은 저에게도 큰 기쁨입니다. <오체불만족> 한국판 출판에 진력해주신 장성규 님이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진심으로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갑작스런 일에 식구 분들의 낙담이 얼마나 크실까 걱정이 됩니다. 식구 분들이 몸조심하시고 기운내시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장성규 님의 명복을 빕니다.


후회 없는 삶을
필자는 오토다케 씨의 메시지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미망인에게 보냈다. 그 때부터 1년, 그리고 봄이 지나갔다.

“장애는 불편합니다. 그러나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일본어판 <오체불만족>의 유명한 광고문구이다. <오체불만족>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문장이다.

장성규 씨가 생각한 한국판 광고문구는 “신체는 불만족, 그러나 인생은 대만족!”이다. 책의 에센스를 한 줄로 표현한 훌륭한 광고 문장이다. 일본어판 문구와 비교해도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은 문장이다.
그는 이 책을 수없이 읽었다고 한다. 책 뒷면의 광고문구는 이렇다. “어떠한 시련도 행복의 기회일 뿐, 불가능은 없다.” 필자는 이것이 그의 메시지라 생각하고, 이제 슬퍼하지 말자고 마음먹고, 오늘도 웃고 살자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지금의 일이 언제 마지막 일이 될지 모른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혹시 우리 아이들에 대한 유언이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항상 눈앞의 일에 자긍심을 가지고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자의 친구는 이러한 가르침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간 것이다.

나카무라 에미코(中村 惠実子) 씨는 일본어 강사와 통·번역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며, 고창읍에 살고 있다.

※다음은 이 글의 일본어 원본입니다

   

나카무라 에미코
(中村 惠実子)


五体不満足にまつわる思い出

ーチャン・ソンギュという編集者ー

日本で一番有名な身体障害者は何と言っても「乙武洋匡」さんだろう。1998年出版の「五体不満足」は日本の大ベストセラーになり、韓国でも翻訳出版されヒットした。これを韓国に持ち込んだのは、チャン・ソンギュさんという編集者だ。彼は日本出張の折、大きな書店で五体不満足の表紙を見て強い衝撃をうけた。「これは絶対韓国でもいける!」そう確信したチャン氏はすぐさま版権交渉にのりだし成功した。結果として、日本からの翻訳モノ、障害者モノという販売が難しいジャンルで未曾有の大成功を納めた。その後五体不満足は「読まなければいけない本」の扱いをうけ、韓国の小学校の教科書にも掲載され紹介された程である。実はこのチャン氏は私の大学院時代の一年後輩である。修士課程も博士課程も一足先に私が入学した。その当時、忠清南道にいた私たちは、夫婦単位で良く遊び、仲よく付き合っていた。全員が修士か博士課程の学生だった。一番先に、博士号を取得したのが、私の夫だったか。

 

ー五体不満足出版にまつわるエピソードー

 

去年の4月の終わり頃だった。チャンさん夫婦が高敞を訪れてくれた。チャンさんはその前の年に大変な苦労をして博士学位を取得していた。学位取得にまつわる苦労話や、編集者時代の話を沢山披露してくれた。特に「五体不満足」出版の詳しい話を沢山聞いた。出版当時はさっぱり売れなかった話、何とか人の目に留めてもらおうと、必至でコピーを幾つも考えて、毎週毎週違うコピーを作り、自費で新聞に広告を打っていた話。いきなり火がついたように売れ出して、出版社の電話が鳴りやまず、しょうがないのでシャッターを下ろしてみんなで飲みに行った話。来韓した乙武氏を金浦空港に迎えにいったものの、予想してなかったほど沢山の報道陣が詰め掛け大変な騒ぎになってしまった話。お酒の勢いも手伝って、チャンさんはその晩、なぜだか特に饒舌だった。晩の2時まで語り尽くして、チャンさん夫婦は帰っていった。

 

 ー突然の死ー

 

その次の日だった。夕方家族で高敞邑城を散歩していた時、夫の携帯が鳴った。チャンさんの奥さんからだった。夫の顔色がさっと変わった。「チャンさんが心筋梗塞で急死したって。」

次の日、葬祭場に向かった。未亡人は力が抜けたような顔付きで、それでも気丈に弔問客を迎えていた。その横で、残された二人の娘たちは友人に囲まれて泣きじゃくっていた。葬祭場を後にし、高敞の家についてすぐ乙武洋匡氏に連絡を取った。と言っても私が個人的に知っている筈がない。彼の所属事務所、出版社など思いつく限りのところに電話をかけ、メールを送り、何とか取り次いでもらうようにお願いした。彼のお嬢さんたちは、編集者時代のチャン氏を知らない。これから父親なしで生きていく娘さんたちに、お父さんの偉業を証明してあげたかった。だから乙武氏に葬式に弔花を送ってもらうか、弔電を送ってもらえたらとお願いした。当然、韓国での五体不満足出版にチャン氏が尋常でない努力をしたという故人から聞いたばかりの話を添えて。結果、葬式の日は過ぎてしまったが、乙武氏からチャン氏の家族にお悔やみのメッセージを頂いた。 

 

ー 乙武氏からのメッセージー

 

『五体不満足』のような本が、愛すべき隣国である韓国でも広く読まれ、多くの方にそのメッセージが伝えられたことは、私にとっても大きなよろこびです。その『五体不満足』韓国語版の出版にご尽力いただいた張様のあまりに早過ぎる死に驚くとともに、心から哀悼の意を捧げます。突然のことに、ご家族様のご落胆もいかばかりかと存じます。どうぞご自愛くださいませ。心よりご冥福をお祈りいたします。

 

 ー悔いのない生をー

 

私はメッセージを韓国語に翻訳して未亡人に送った。あれから一年、彼が亡くなった季節が過ぎた。「障害は不便です。だけど不幸ではありません。」これは五体不満足の有名な日本語コピーである。五体不満足を知っている人ならこのコピーも当然知っている。チャン氏が考えた韓国版のコピーは「身体は不満足、でも人生は大満足」。本のエッセンスを一行で表した素晴らしいコピーだ。日本版コピーに勝るとも劣らない。彼はこの本を数えきれないほど読んだと言った。この本の裏表にはこう刻まれている。「どんな試練も幸福のきっかけ。不可能はない!」私はこれが彼のメッセージだと思い、もういつまでも悲しまないことを心に決めて、今日も笑って生きようと思っているのである。そして私の今の仕事がいつ最後の仕事になるかもしれないことを切実に感じた。今の仕事が子供達への遺言になるかもしれない。だからいつも目の前の仕事に誇りを持って取り組まないといけないのだと。私の友人はそれを教えて、この世を去って行ったのだから。

나카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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