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김 수 복 (르포작가
|
대기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차렷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하나도 명예롭지 않게 ‘명예퇴직’을 한 사람들의 모임이 있는데 이 모임의 구성원들이 과거에 대기업 중간 간부급들이다.
이들은 회사를 떠났다기보다 쫓겨난 지 벌써 십 년도 훨씬 넘었건만 지금도 그 모임을 유지하며 그 시절의 관습을 ‘수행’한다. 회사의 사훈을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된 모임의 끝은 회사의 사가로 마무리된다. 고대의 밀교의식을 연상케 하는 이런 회합을 통해 그들은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를 되새기며 그것을 바탕으로 참혹하기 짝이 없는 오늘을 견뎌낸다.
자기 자신을 버린 대기업의 속성에 관한 비판이나 원망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과거 노예제도 시대에 ‘주인’을 떠났으면서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영낙없이 닮은꼴이다. 대기업이 ‘대기업’일 수밖에 없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한다면 다소 무리한 진단이겠지만,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어이없는 대기업 증후군은 정치권에서 일정부분 견인해 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오늘날의 대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이력을 세심하게 살펴보면 입에서 하품 소리가 절로 나온다. 성장 잠재력이 있는 중소기업이 그 능력을 소신껏 발휘해서 대기업으로 성장한 예를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은 정책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정경유착으로 노동자를 착취해서 몸집을 키운 경우가 태반이다. 이러한 대기업들은 내부에 특수한 두뇌집단을 거느린다.
이 특수한 전문가들은 성장 잠재력이 있는 중소기업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찾아낸 뒤에는 다시 약점이나 허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무기로 대기업의 계열사로 편입시킨다. 단번에 먹어치우기 어렵다는 판단이 서면 귀신도 모르게 감쪽같이 망가뜨린 뒤에 차근차근 천천히 먹어 들어간다.
<표백>이란 제목의 소설이 있다. 2011년 한겨레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젊은이들의 자살을 얘기하는 소설인데 그 자살의 이유가 섬뜩하게 흥미롭다. 하라는 대로 하고, 생각하라는 대로 생각하고, 반항하지 말라 해서 반항도 하지 않고, 로봇처럼 묵묵히 틀에 박힌 일을 해 온 결과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른바 중산층의 반열에까지 들어선 것이다.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이 뭐지? 이게 사는 것인가? 소나 개, 돼지도 이런 정도는 살고 있지 않은가? 도로변의 보도블록처럼 한 뼘 반 정도의 틀 안에서만 애달카달 해온 자신의 인생이 너무도 불쌍하다. 소설의 작가는 그것을 표백이라고 한다. 아무 색깔도 없는 것. 너가 나 같고 나가 너 같은 상태. 나는 어디로 갔는가? 너는 거기에 있는 게 확실한가? 이제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다. 오르고자 한다면 그 자체가 반항으로 읽혀지면서 어디선가 불시에 칼날이 날아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이 엄청난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하나 자살뿐이라는, 그런 내용의 소설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치지도외할 일만은 아닌 시대인 것 같다.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참혹하다. 주주나 임원들에게는 수억씩 이익을 배당하면서 그 이익을 가능하게 해준 노동자들은 온갖 이유로 쫓아내는 게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대기업과 그 대기업을 만들고 또한 기생해 온 정치집단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산다고 생각하는가. 의식주인가? 의식주만 거지꼴을 겨우 면할 정도로 해결되면 만사 오케이, 땡인가? 미래가 불안하고 꽉 막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이를 낳으라 독촉하는 당신들, 그 아이가 자라면 데려다가 노예처럼 부려먹다가 쫓아낼 궁리나 하고 있는 당신들, 당신들은 이 땅의 무엇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