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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화 (고창지역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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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다우는 대산면 회룡리 용두촌(龍頭村)의 서쪽 뜸이다. 옛날 장자산면(莊子山面)의 회룡리(回龍里)구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회룡과 구동리(九洞里)가 통합된 이후, 용두분리에 따른 대산면의 맨 서쪽마을이다. 영광(靈光)읍과 경계한 마을로, 조선 중종연대에 좌랑(佐郞) 성여원(成汝原)이 경기도 양주(楊州)땅에서, 장사산의 길지를 택하여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지낸, 선고의 묘를 이장하고 명당의 발복을 이어갈 요랑으로 제비집 형국(燕巢形局)에, 터를 닦아 곡다우라 부르고 자작일촌하고 있다.
구전(口傳)의 말미를 열어보면, 용두골의 서쪽 고개마루에 곡다우 전설이 있다. 옛날 누나 동생의 다정한 남매가 이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때마침 한 여름 소나기가 퍼붓게 되어, 두 남매의 얇은 옷이 흠뻑 젖어버렸다. 앞서가는 누나의 옷차림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아리따운 곡선미가 들어나게 되자, 남동생이 원초적인 성적충동에 흔들리더니, 말초신경이 크게 자극되어 순간적으로, 흥분을 누를 길 없는 나락에 빠져들었다. 겨우 죄의식을 깨닫게 된 동생은 저만치 걸어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응시하면서, 갑자기 자기 양물을 돌로 찍어 자결하고 말았다. 동생의 처절한 죽음 앞에 선 누나의 눈물겨운 독백이 더욱 애처로웠다. 「에잇 몹쓸 놈」「그렇게 절박했으면 꼭 달라고 떼라도 써보지」 일그러진 누나의 꼴이 말이 아니었단다. 이런 연유에서 이 고개가 「달래고개」사연이 되자, 순박한 선비들이 한자로 수식하다 보니, 곡다우(曲多于)로 표기하게 되었다 한다.
(주) 좌랑(佐郞) : 조선조때 6조의 정(正)6품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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