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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 복(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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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늦가을, 이제 곧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을 앞둔 이 계절이 되면 우리 동네 할머니 한 분께서는 고민이 많아진다. 더불어 얼굴 주름도 깊어진다. 재작년에도 그렇고 작년에도 그러시더니 금년에도 어김없이 그러신다.
“아이 쩌그 머시냐, 돈 준다는디 안 팔 수도 없고 잉? 팔자니 이놈에 가심이 영 껄쩍지근하고 잉? 아따 참말로 이놈에 것을 으째야 쓸 거라우?”
사실은 남아 있는 물건도 없다. 어제 이미 팔아버렸다. 팔고 나서 밤새 생각해보니 영 편치가 않다. 그래서 만만한 이웃 홀아비를 찾아와서 인생상담도 아니고 신세한탄도 아니면서 상담인 것 같은, 한탄인 것 같은 말씀을 연신 쏟아내신다.
정말로 이 문제는 고민이 필요하다. 고민도 아주 깊고 넓은 것이 필요하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는 것이냐, 공급이 있는 곳에 수요가 있는 것이냐. 이런 질문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문제로 환원되어 버리기 때문에 일견 무책임하고 멍청(?)하기조차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죽는 줄을 알면서 부득부득 살아가는,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라고나 할까.
물론 고추농사가 허천날 지경으로 잘 되었다면 이런 고민은 설 자리가 없다. 좋은 고추 팔아먹기에도 바쁜데 희나리고추 따위가 눈에 들어올 것인가. 그런데 그놈의 고추 농사는 해마다 잘 되는 법이 없다. 새빠지게 모종해서 꽃 피고 열매가 맺어 익을 만하면 탄저병이란 녀석이 와서 망나니짓을 해버린다. 겨우 살아남은 것들은 또 태반이 장마철에 썩거나 곯아서 희나리, 희나리, 희나리 노래를 불러대며 나자빠져 버린다.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데 이런 꼴이 되어버린단 말이냐. 할머니는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푼수로 희나리가 되어버린 고추를 만지고 또 만지다가 한쪽에 쌓아둔다. 어떻게 버린단 말이냐. 버리더라도 나중에 버려야지 어떻게 금방 매정하게 버릴 수 있단 말이냐.
“고추 삽니다. 상초, 중초, 하초, 희나리 고추 삽니다. 고추 장사가 지금 마을 앞에 와 있습니다. 고추들 파세요, 고추, 희나리 고추 파세요.”
가을이 깊어지면 단골손님처럼 찾아오는 고추장사의 확성기 소리가 하루에도 두세 번씩 귓전을 간질이며 유혹한다. 희나리 고추를 사다가 어디에 쓰느냐고 물어보면 예전에는 그랬다. 어떤 사람은 군대에 납품한다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라면 스프로 쓴다고 했다. 그런데 요새는 물어보면 열에 다섯은 수출을 한다고 한다. 다른 다섯은 가축사료로 쓴다고 한다. 히히, 어디로 수출을 해? 그리고 가축이 고춧가루 사료도 먹는다냐?
할머니는 킬킬킬 웃어대지만,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쌓아둔 희나리 고추가 문득 돈으로 보인다. 상인의 유혹을 받기 전에는 그저 애물단지 쓰레기에 불과했던 희나리가 상인을 만나면서 돈으로 보이고, 그것은 다시 상인과 헤어지고 나면 고민거리가 되어 할머니를 괴롭힌다.
오메 어쩐다냐. 그것을 누가 먹을까. 아이고 내가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을까. 이 괴로움을 털어내기 위해서 말못하는 강아지를 붙잡고 중얼거려 보기도 하고, 이웃의 홀아비를 찾아가서 자백을 해보기도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져 버렸다. 누가 나 좀 위로해 주시오,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본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 이웃의 할머니는 오늘도 죄인이 되어, 죄인의 심사가 되어 당신의 가슴을 남몰래 쥐어뜯는다.
이 요상한 죄를 누구에게 물어야 옳은 것인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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