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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열 (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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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3일 목요일 고창군립도서관에서 고창의 문화를 이끌고 있는 문화계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은 고창농악의 모든 가락과 형식을 현재에 되살려 전승시킨 고창농악의 중시조 역할을 한 고(故) 황규언 선생의 공적비를 건립하기 위함이라 한다. 이 공적비건립추진위원장회는 송영래 고창문화원장이 위원장을 맡았고, 부위원장은 한국예총 고창군지부 김정웅 회장, 한국국악협회 심재규 회장, 고창문화연구회 백원철 회장 등을 추대하여 고(故) 황규언 선생 공적비 건립을 위해 구성되었다.
고창농악의 중시조 황규언 황규언(黃奎彦)선생은 본이 창원(昌原)이고 1920년에 출생하여 2001년에 타계하셨다. 그는 고창군 대산면 덕천리에서 태어나시고,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에서 사셨다. 그는 고창농악의 모든 가락과 형식을 현재에 되살려 전승시킨 고창농악의 중시조(中始祖)라 일컫는다고 한다. 그는 10대 때부터 마을에서 굿을 시작하여, 1940년대부터 쇠의 명인인 박성근에게 쇠를 사사받고, 고창의 쇠 명인 신두옥, 신영창, 김상구와 함께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45년부터 장구명인인 김만식에게 장구를 사사받았다.
또한 1985년 고창농악단을 창설하게 되는데, 초대 상쇠를 맡아 단절된 고창농악체계를 확립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1990년부터 2001년까지 고창농악을 알리는데 전력을 다하셨다. 그는 전국의 풍물패 및 대학생, 고창군민 등 1천여명에게 고창농악을 사사하여 고창농악 전승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고창의 훌륭한 무형의 문화 예술을 후대에까지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고창의 전통문화를 한 단계 격상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살아생전 전국의 수많은 농악경연대회에서 매년 그 우수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 결실은 1999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8호 고창농악 상쇠 기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으며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2000년에는 30여년 만에 단절되었던 고창농악 ‘풍장굿’ ‘도둑잽이굿’를 재현하여 다시 한 번 그의 위상을 높인 계기가 되었다.
고(故) 황규언 선생의 공적비는 우리들이 세워야 고(故) 황규언 선생의 공적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 회의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이 회의에서 논의된 공적비를 건립하기 위한 기금모금 방식은, 황규언 선생의 고창문화에 대한 업적을 군민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중요한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이러한 것을 실행할 때는 건립에 드는 비용을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받아 건립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를 추진하는 고창농악전수관은 조금 다른 방법을 택하였다. 그것은 고(故) 황규언 선생의 업적을 고창농악이라는 좁은 관점이 아닌 고창문화로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적비 건립을 위한 모금은, 공적비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는 의미에서 고창군민을 비롯한 문화사회단체의 힘을 모으고, 나아가 전북권의 문화예술인과 전국에 퍼져있는 고창농악 문하생들의 자발적 모금활동으로 확대해 나가자는 의견이었다.
이러한 방식의 공적비 건립을 통해 고창농악이 가지는 고창인들의 삶과 문화를 직접적으로 전국과 연결해주는 매개체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고창의 농악문화가 바로 한국의 전통문화의 정수임을 전국에 널리 알려 고창의 이미지를 한 단계 끌어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고창농악은 고창의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하지만 이는 고창만의 유산이 아닌 가장 한국적인 한국문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민족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고(故) 황규언의 공적비를 전 군민이 참여하여 건립하는 방식을 택한 추진위원회의 선택은 올바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성금을 5만원 1구좌 이상으로 제시한 점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이다. 오히려 공적비 같은 경우는 고창군민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한 소액으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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