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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화 (고창지역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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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면 은사마을에서 문수사 길을 열어 가다보면 절 어귀마을 칠성동(七星洞)에 이른다.
도중에 신기(新基)마을 오르막길에 이르면 길 오른편에 아담한 효자각이 한 채 덩그머니 서서 길손을 맞아주고 있다.
이 정려가 구한말의 고창고을 마즈막 정문(旌門)이다. 시대의 불운으로 비록 작설지전(綽楔之典)엔 못 미쳤으나 당당하게 예천(禮薦)을 거친 최후의 작설(綽楔)인 것이다. 그러니까 1910년 8월 22일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이 어전을 대신해 조선통감부 데라우찌 일본 육군대장과 역사적 치욕의 장인 이른바 ‘경술년 한일 합방 조인식’을 치르게 되었을 때 이 정려는 예천을 거쳤으나 국왕의 대결이 생략된 채 세우게 된 민족의 한이 서린 유서 깊은 정려이다.
그 주역이 열세 살에 모친상을 당해 10리허에 장사 지낸 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탈상을 준행대로 지켜낸 평범한 효행으로 상제의 도리를 다한 분이다.
뒷날 유림들이 자별나고 갸륵한 그의 효심이 소문으로 알려지게 되어 경술합방 직전에 천거해 올린 자연지심이 되어 유명한 독립운동가 수남 고석진(秀南 高石鎭) 어른이 그의 행장을 집도해 준 것이다. (주) 이완용(李完用·1858~1926, 字: 敬德, 號: 一堂, 본관: 牛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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