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고등학교의 설립은 1919년이다. 1945년 광복까지 고창고(당시는 고창고등보통학교)의 교육은 일본어로 행해졌을 것이다. 당시 학교 도서관에 있었던 도서도 당연히 일본어 서적이다.
현재 고창고등학교에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어서적이 약 1000권 정도 보관되어 있다. 필자는 지난달 고창고등학교에서 일본도서 분류를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아 일주일 정도 학교에서 작업하였다. 너무 오래된 책이었기 때문에 분류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사실 요즘 일본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표기나 한자가 많이 나와 컴퓨터로 기록하기 힘든 것도 있었고, 손대기만 해도 너덜너덜 벗겨지는 책도 있었다. 얼마나 책이 낡았는지 먼지 양이 보통이 아니었다. 서고에서 있기만 해도 눈물이 흐르고 콧물이 떨어지며 기침이 나왔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재채기가 계속 나왔다. 담당선생님이 방의 난방, 환기 등에 많은 신경을 써 준 것이 고마웠다. 어쨌든 분류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고에서 부지런히 작업을 했었다.
장서는 지리·의학·농학·경제·정치·수학·문학·역사·고전·한문·미술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발간연도와 출판사가 없는 책도 있고, 읽을 수 없는 문자도 있고, 완전한 분류라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책의 대강의 내용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광복 후 반일교육의 여파로 일본서적이 폐기될 가능성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여기에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마운 뿐이다. 도서관의 책인데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빨간 펜으로 선을 그은 책이나, 연필로 낙서한 책도 있었다. 기증자가 적은 한마디나, 누군가가 쓴 시도 보였다. 하나하나에 손을 두고 있어서는 작업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잘 볼 수는 없었지만, 참으로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부안면에서 마스토미 야스자에몽(枡富安左衛門) 씨가 학생을 모아서 시작하는 학당이 고창고등학교 최초의 모습이었다. 경기 악화의 여파로 개인적으로 학교를 유지하기가 매우 곤란해져, 결국 마스토미 씨는 학교 경영을 다른 곳에 양도하게 된다. 고창군수의 호소로 고창의 많은 유지들이 학교를 존속시키는 것에 힘을 썼다. 그 당시 만들어진 고등보통학교는 대부분 대도시에 있었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 고창만이 지리적으로 이색적이다. 고창 같은 농촌에는 고등보통학교가 없었다. 당시 고창사람의 교육의식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라 생각한다.
고창고등학교의 역사교육자료관에 역대 교장의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초대 교장으로서 마스토미 씨의 사진이 있었다. 미스토미 씨는 1995년에 한국의 모란장이라고 하는 훈장을 받았다. 당연히 그 때 마스토미 씨는 고인이었지만. 모란장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서 공을 올려, 대한민국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인정받는 사람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일본인의 수상자는 마스토미 씨 뿐이다. 마스토미 씨는 부인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독립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던 일본인이었다. 농장경영으로 나온 이익을 조선의 교육사업에 돌렸다. “정말로 조선의 독립을 바란다면 조선사람이 배워야 한다!”고 조선인 학생에게 말버릇처럼 하였다고 한다.
이번 서적 분류작업을 계기로 알게 된 것이었지만, 마스토미씨 에 관한 서적이 일본에서 몇 권 출판되어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중개자, 마스토미 야스자에몽~한국과 그 시대>(구로세 에쯔나리(黒瀬悦成))와 같은 책도 있다. 어느 일본인이 일제강점기에 고창에서 이러한 업적을 남기고 있었다는 것에 현재 이 땅에 사는 한 일본인으로서 대단히 기쁘다.
필자는 앞으로 고창을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에게 마스토미 씨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 일제강점기라는 조선인이 바라지 않는 식민지시대에, 조선의 발전을 바라며 조선인의 교육에 투자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창 젊은이의 미래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움직인 일본인이 있었다는 것을, 100년 가까운 시간이 경과된 고서를 일주일간 접하면서 필자는 이렇게 훌륭한 역사의 한 면을 접했다. 이 사실은 고서들이 필자에게 준 선물이라 느껴졌다. ‘손질해 주어 고맙다’고….
나카무라 에미코(中村 惠実子) 씨는 일본어 강사와 통·번역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며, 고창읍에 살고 있다.
※다음은 이 글의 일본어 원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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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에미코 (中村 惠実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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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敞高校にある日帝時代の古書と創立者枡富氏
高敞高校の創立は1919年である。1945年の光復まで高敞高校(当時は中学校)教育は日本語中心で行われたはずである。当時学校の図書館にあった蔵書も当然日本語書籍だ。現在でも高敞高校の書庫には、日帝時代の日本語書籍が約1000冊ある。先日高敞高校から書籍分類の手伝いを頼まれ、一週間ほど学校で作業をしていた。あまりにも昔の本であるため、現在では分類不可能になっているものがあったようだ。現在の日本ではほとんど使われない表記の漢字が多く出てきて、略字でなければパソコンで記録することができないものもあった。時間が経ちすぎて老朽化し、触るだけでボロボロと剥がれてくる本もあった。あまりにも本が古いため、埃の量が普通ではない。書庫でいるだけで涙が流れ、鼻水が垂れる。最初はずっとくしゃみが出てきた。担当の先生が暖房に換気に水分にと、とても気を使ってくれたのがありがたい。とにかく記録して分類しないと何も始まらないので、書庫に篭ってコツコツと作業をこなした。
蔵書は医学・農学・経済・政治・数学・文学・歴史・古典・漢文・美術の多岐に渡っていた。年度や出版社のない本もあり、判読できない文字もあった。完全な分類とは言い難いが、それでも大体のところは把握できるようになった。光復後、反日教育の煽りをうけて、これらの書籍が処分される可能性もあっただろうに、そうならずに現存していることがありがたい。図書館の本であるのに、借りた誰かが赤ペンで傍線を引いたり、鉛筆で書き込んだ跡がある本もある。日帝時代の高敞高校の学生が書いたのであろう落書きもある。寄贈者からの一言や、誰かが書いた詩も書き込まれている本もあった。その一つ一つに手を留めていては、作業が進まないのでじっくり見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が、実に興味深い作業だった。
高敞の扶安で枡富安左衛門氏が学生を集めて始めたのが、高敞高校最初の姿である。不況の余波で個人での学校維持が困難となり、枡富氏は学校経営を他に譲渡することになる。高敞郡守の呼び掛けのもと高敞の有志が出資し学校を存続させた。「自主独立は教育を通じての知性の開明が伴わなければならない」を合い言葉に地元の人間が地元に子女教育の基礎を作ったのだ。同時期に作られた中学校というのは、ほとんどが大都市にある。当時の資料を見ると高敞だけが地理的に異色である。そのような農村は他になかった。当時の高敞の住人の教育意識がどれだけ高かったのかを伺い知ることができるエピソードだ。
現在高敞高校の歴史教育資料館に歴代校長の写真が展示されているが、初代校長として枡富氏の写真が飾られている。枡富氏は1995年に韓国の牡丹章という勲章を受けている。当然その時枡富氏は故人であったが。これは韓国の政治・経済・社会・教育・学術分野において功を建て国民の福祉向上と国家発展に大きく寄与したと認められる者に授与される賞だそうだ。日本人の受賞者は枡富氏一人である。枡富氏は婦人の影響でキリスト教の信仰を持っていた。朝鮮の独立を心から願っていた日本人である。自分の農業経営からでた利益は教育事業にまわしてきた。「本当に朝鮮の独立を望むなら学ぶのだ」と朝鮮人学生に対して口癖のように説いていたそうだ。今回の書籍分類をきっかけに調べたことだが、枡富氏に関する書籍が日本でいくつか出版されていた。「知られざる懸け橋―枡富安左衛門と韓国とその時代」黒瀬悦成著。日本人が日帝時代に高敞でこんな業績を残していたとは、現在この地に住む日本人としては感無量である。
私は今後この町を訪れる日本人観光客に枡富氏の業績を伝えていきたいと思う。日帝時代という朝鮮人の望まない形での植民地支配があった時代に、それでも朝鮮の発展を願って教育の基礎を作ろうとした日本人がいたことを。この高敞の若者の未来を思って動いた日本人が確かにいたことを。100年近く経過した古書に一週間関わって、私はそんな素晴らしい歴史の断片に触れた。この事実は古書たちが私に贈ってくれたプレゼントのように思えるのである。「手入れしてくれてありがとう」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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