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편이 하는 일 중 하나가 <백촌강전쟁기념사업회>라는 사단법인의 사무국장 일이다. 660년 백제 의자왕이 당나라에 연행돼 백제는 멸망했다고 하지만, 백제 세력은 그 후에도 백제의 고토에서 나당군에 대항해 백제부흥을 위해 끝까지 싸웠다. 그 마지막 결전이 663년 백촌강전쟁이다.
“백촌강은 지금의 금강이다”라고 이병도 교수가 말하였지만, 현재는 부안군의 우금산성 아래 두포천의 하류가 유력한 설이다. 어쨌든 백촌강전쟁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관심도 관계도 없는 일이다. 우선 한일 간 역사를 인식하지 않으면 고찰할 수도 없다. 이 전쟁은 한·일·중의 삼국이 깊게 관련한 국제전쟁이며, 그 후 삼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쟁에 참가한 인원수의 규모만 봐도 고대의 대전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백촌강전쟁에 관한 일본쪽 번역과 통역, 홍보를 하고 있다.
백제 멸망 후 신라는 한반도 남부를 통합하고, 당은 신라와 더불어 고구려를 멸망시켜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신라는 쉽게 백제를 물리친 것이 아니었다. 660년부터 663년까지의 백제부흥전쟁을 자세히 고찰해 보면, 일본에서 원군을 지원받은 백제가 나당군에 승리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의 마지막 왕자 풍과 복신이 서로 갈라졌다. 두 명은 서로를 의심해 결국 풍 왕자가 복신을 살해했다. 백제군은 뛰어난 전쟁능력을 가진 역전의 대장군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결전의 결과는 분명했다. 패전 후 백제의 유민들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신라의 장군들은 백제 사람들을 추적해 살해했다.
‘썩은 다리’라는 이름의 다리가 전라남도 함평에 있다. 그 당시 많은 백제 유민들이 살해당한 장소라 전한다. 한반도에 있으면 목숨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많은 백제 사람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백제인의 기술로 축성된 고대산성이 일본 서쪽에 수십 개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시코쿠 가가와현의 야시마성(屋島城)이다. 이 야시마성이 백제계 고대산성이라고 인정받은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 계기를 만든 분이 현재 가가와현에 거주하는 히라오카 이와오(平岡岩夫)씨다. 원래 오사카에 있는 기업의 회사원이었던 히라오카씨는 가가와현으로 전근해 일하게 되면서 야시마성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회사에서 히로시마로 전근 명령이 내렸지만, 야시마를 떠나고 싶지 않은 히라오카씨는 회사를 퇴직하고 가가와현에 남았다. 그 히라오카씨가 2002년에 야시마 산속에서 발견한 것이 고대 산성의 성문터였다. 히라오카씨의 자택에는 ‘야시마성연구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일본에 갈 때마다 고대산성을 하나하나를 답사하는 우리 부부는 2010년 여름에 히라오카씨의 안내로 야시마성에 올라갔다. 필자가 인터넷으로 히라오카씨의 정보를 알게 되어 전화로 부탁했다. “학술적인 것은 모릅니다만”이라고 하면서, 히라오카씨는 야시마를 안내해 주었다. 3시간 정도 야시마성을 돌아다닌 뒤, 작별하기 전에 히라오카씨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세대가 앞으로 역사를 검증해 고찰해 나가는 것입니다. 고고학만이, 역사학만이 아니고, 전문분야의 틀을 넘어서 큰 시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남편이 하는 일은 나중에 시대가 필요로 할 때가 꼭 온다고 생각해요. 열심히 하세요.”
우리는 히라오카씨에게 강력한 격려를 받았다. 한국에 돌아오고, 그 후 백촌강전쟁에 관한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개인이라도 소수일지라도 백촌강전쟁의 결전지에 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가능한 한 현지로 데려가 안내해 왔다.
지난 5월 15일 일본 큐슈의 오노죠 시민단체가 고창을 방문했다. 오노죠(大野城)성도 백제의 유민이 축성한 고대산성이다. 역사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국제교류를 시작하자는 남편의 요청에 응해준 오노죠시 한일문화교류회의 고창방문이었다. 방문단장인 마츠나가 유우키씨는 고창방문을 매우 기뻐해주었고, 특히 역사적인 연결을 귀중하게 생각해 주었다. “오노죠시와 한국의 전라북도에 이런 역사적인 인연이 있다니! 앞으로도 반드시 교류를 계속해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씩 실천합시다”라고 뜨겁게 말해주었다. 앞으로 고창군과 오노죠시 간 초·중·고 학생의 국제교류, 교환 홈스테이 등을 할 예정이다. 필자는 이 기간 통역과 번역으로 몹시 바쁜 기간이 되었지만, 오노죠시에서 오신 분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떠올랐다.
고대에는 일본인의 선조 일부가 한반도에 살고 있었다. 지금 그 인연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참으로 비슷하다. 동시에 완전히 다른 면도 확실히 가지고 있다. 백촌강전쟁은 한국과 일본이 갈라지는 큰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이다. 현재 일본인의 모든 것이 한반도 유래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 상당히 큰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다. 고대사를 푸는 것을 통해 일본·한국·중국이 이렇게까지 빈번히 왕래해 왔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민간인 히라오카씨의 애착이 고대유적 발견의 계기를 만든 것처럼,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는 사람이 증가하게 되면,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수도 있다. 한국의 다이나믹한 고대사가 해외에 알려지는 것의 가치는 엄청 큰 것이다. 오노죠시와의 교류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외국인이 이 땅을 방문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歴史を基盤とした国際交流
私の夫がやっている仕事の一つに「白村江の戦い記念事業」という社会法人がある。660年百済の義慈王が唐に連行されて百済は滅んだとされたが、百済の残存勢力は、その後も韓半島各地で新羅・唐軍に対して百済復興を賭けて戦った。その最後の決戦となったのが663年の白村江の戦いである。その決戦地は以前は錦河であると言われていたが、現在では扶安郡の禹金山城付近の川であるという説が強い。どちらにしても白村江の戦いを知らない人にとっては、どうでも良いことであり、関係のないことだ。まずは歴史にそういう事実があったということの認識なくしては話が始められない。この戦いは韓国・日本・中国の三国が深く関連した国際戦争であり、その後の三国の方向性に大きな影響を及ぼした。以外と知られていないが、戦争に参加した人員の規模だけ見ても、古代の大戦争なのである。夫はこの会の発足者であり事務局長だ。私はこの事業に関する日本向けの翻訳・通訳・広報をやっている。
百済滅亡後、新羅が唐と共に高句麗も滅ぼし、韓国の南部に新羅の覇権を誇る時代になるのは周知の事実だ。しかし新羅は簡単に百済を破ったのではない。660年から663年までの百済復興戦争一つ一つの戦いを追って検証していくと、日本からの大援軍を受けた百済が、新羅・唐軍にに勝利してもおかしくない状態だった。しかし百済では最後に百済の王子豊と福信将軍が決裂した。二人はお互いに疑いあい、結局福信は豊王子に殺害される。百済軍は地の利の長けた歴戦の大将軍を失ってしまったのだ。決戦の結果は明らかだった。敗戦後、百済の遺民たちは南へ南へ逃げていった。しかし新羅の将軍たちは、その百済人たちを追い詰め殺害する。腐った橋という名の橋が全羅南道ハムピョンにあるが、そのとき多くの百済遺民たちが殺された場所であるという。韓半島に留まっていては命がない。百済人たちの多くは日本に亡命した。
この百済人の力を借りてつくられた古代山城として認定されている城が日本の西部に十数ヵ所ある。その中の一つに四国香川県の屋島城がある。この屋島城が百済系古代山城として認められたのはそう古い話ではない。認定のきっかけをつくったのは、現在香川県に住む民間人の平岡岩夫さんだ。元々大阪のメーカーの会社員として転勤で香川にすむことになった平岡さんは、屋島の魅力に惚れ込んだ。あるとき会社から広島に転勤命令が出たが屋島を離れたくない平岡さんは会社を退職して香川に残った。その平岡さんがその後2002年に屋島の山の中で発見したのが古代山城の城門跡だった。平岡さんは自宅に「屋島城研究所」の看板を掛けている。
日本に行く度に、古代山城を一つ一つを踏査している私たち夫婦は、2010年の夏、この平岡さんの案内で屋島に登った。私がネットで平岡さんのことを知り、当日電話でお願いしたのだ。「学術的なことはわかりませんが」と言いながら平岡さんは屋島を案内してくれた。3時間ほど屋島の山を駆け巡り、お別れする前に平岡さんは私たちにこう言った。「あなた達の世代がこれから歴史を検証して考察していくんですよ。」「考古学だけとか歴史学だけとかじゃなくて、専門をまたいで大きな視野で見て研究する人が必要なんですよ。ご主人ののやってることを、そのうち時代が必要とするときが来ると思いますよ。頑張ってください。」私たちは平岡さんに力強く励まされた。韓国に帰って、その後も白村江の戦いに関する活動を地道ながらも行ってきた。個人であっても少人数であっても、白村江の戦いの決戦地に行きたいという方は出来る限り現地に連れていき案内してきた。
先日5月の第三週、九州の大野城市の団体が高敞を訪問した。大野城も百済の遺民が築いた古代山城だ。歴史的な繋がりを基盤として国際交流を始めませんかという夫からの問いかけに応じてくださった市の韓日文化交流会の高敞訪問である。訪問団長の松永勇基氏は高敞への訪問をとても喜んでくださり、特に歴史の考察部分に関して大野城市との繋がりを貴重視してくださった。「大野城市と韓国の全羅北道にこんな歴史の繋がりがあるとは。これからも必ず交流を続けて出来ることから一つ一つやっていきましょう。」と熱く語ってくださった。将来的には高敞郡と大野城市の小・中・高校の生徒の国際交流、交換ホームステイをする予定である。私はこの期間通訳翻訳で大変忙しい期間となったが、大野城市から来た方々が喜んでくださる姿を見て、なんともいえない満足感を覚えた。
古代には日本人の先祖の一部が韓半島に住んでいた。今その絆を再確認しているのである。日本と韓国は実によく似ている。同時に全く違う面もはっきりと持ち合わせている。「白村江の戦い」は韓国と日本が枝分かれする大きなきっかけとなった事件である。現在の日本人すべてが朝鮮半島由来だというわけではないが、大きな影響を受けているのは間違いない。古代史を紐解くことで、日本と韓国と中国はこれほどまでに頻繁に往来してきたのかということに驚く。民間人の平岡さんの愛着が古代遺跡発見のきっかけをつくったように、歴史に関心をもち調べる人が増えることで、新しく研究がすすむこともある。韓国のダイナミックな古代史を国外に知らせていくことの価値は大きい。大野城市との交流だけに留まらず、より多くの外国人にこの地を訪れてもらいたい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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