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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과 연결되는 시대
나카무라 기자 / 입력 : 2012년 07월 09일(월)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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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무라 에미코 (객원기자) |
거의 매일같이 일본 블로그에 기사를 쓰고 있다. 내용은 책이나 교육에 관한 일이 많지만, 고창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쓰고 있다. 필자의 고창에 대한 기사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블로그에 고창관광과 관련된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지난달 블로그를 통해 일본의 라디오방송국에서 취재 의뢰가 들어왔다. “국제결혼에 대한 특집인데, 에미꼬씨의 국제결혼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는 것이었다. 왜 우리 블로그를 선택했는지 물어봤는데 “국제결혼 블로그의 상위 랭킹자 중에서 찾았다”고 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연락을 하는 것이 정말로 신기하다. 블로그는 인터넷에 접속할 수만 있으면 아무나 볼 수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블로그에 자주 답장을 주시는 분이 있었다. 닉네임만 봐도 재일한국인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분이 한국의 매장방법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해 봤더니, 필자가 긴 글로 자세회 설명하고 사진까지 첨부한 한국식 매장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고 한다. 그분의 부모님은 경남 밀양출신이고, 경남은 몇 번 방문하였지만, 전라도에는 아무 인연이 없었다고 한다. 필자가 올리는 고창의 기사를 보고 “언젠가 고창을 방문하고 싶다”는 답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연세는 70대이셨다. 필자는 그 분의 고창방문이 실현될 거라고는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블로그에 “몇 월 몇 일에 고창에 갑니다”라는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그 분은 필자의 전화번호도, 심지어 이름조차도 모르는 채, 비행기로 부산에 도착해 버스를 갈아타고 고창까지 오셨다. 그리고 곧바로 고창군청에 가서 “에미코씨의 연락처를 가르쳐 주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 신랑의 성은 전주이씨지만, 왜 그랬는지 그분의 신랑이 영천최씨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다행스럽게도 군청 직원들의 친절한 대응 덕분에 제대로 우리 집까지 찾아오실 수 있었다.
그분은 74세의 오 선생님이시다. 문화관광과의 유영란씨는 “시간이 되면 우리 집에도 오세요”라고 말해주셨다. 오 선생님은 그 말에 감탄하고 있었다. 뭔지 모르는 채 고창에 내린 오 선생님의 마음에 그 한마디가 깊게 새겨졌을 것이다. 군청 직원들의 친절에 감사드린다.
한국에는 ‘부모의 날’(어버이날)에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예를 표현하지만, 일본에는 ‘아버지의 날’과 ‘어머니의 날’로 나누어 축하한다. ‘아버지의 날’은 6월인데, 오 선생님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날’ 선물로 ‘고창 여행’을 보내주었기 때문에 갑자기 오게 되었다고 한다.
블로그 기사로 금요일과 토요일은 고창읍성 앞에서 판소리 공연이 있다고 미리 아셨기 때문에 정확히 주말에 맞추어 체류하셨다. 그래서 이틀 연속 판소리공연을 즐기셨다. “고창에서 가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에 “운곡습지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운곡습지에는 보호동물인 수달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계셨다. 오 선생님의 친척 중에서 한 분이 수달 연구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신랑이 안내하여 운곡습지를 한 바퀴 돌아봤다. 수달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틀간 오 선생님은 우리 집의 가족과 함께 움직였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즉석 할아버지’가 생겼다. 오 선생님은 우리 아이들과 아주 잘 지내셨다. 재일한국인라고 해도 2세 3세가 되면 한국어를 할 수 없는 분이 많지만, 이 분은 경상도 사투리가 있는 한국어를 쓰셨다. 우리집 막내가 “할아버지 빨리 오세요”라고 하면 “오냐”라고 대답할 정도로….
오 선생님은 한국에서 태어나 바로 가족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셨다고 한다. 자란 것은 일본, 게다가 어느 시기까지 교육은 완전한 일본어, 그러다가 일본의 패전으로 민족의 정체성 문제가 생기면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길을 모색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본과 한국간을 왔다갔다 한 사람의 정신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고민하고,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기분을 안으면서 살게 된다. 20대에 한국에 시집 온 필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긴 세월을 한국에서 지냈지만 한국인의 기분에 동조할 때도 있고, 한국의 좋지 않은 부분을 깊게 알아 반발할 때도 있다. 도대체 자신은 어느 쪽의 사람인가 혼란할 때가 있다. 필자는 블로그에 그런 것도 포함해 ‘한국에서 사는 여느 일본인의 마음’을 솔직하게 써 왔다. 오 선생님은 그 글 속에서 자신과의 공통점이 느껴졌을 것이 틀림없다.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끼리 블로그에서 만나, 그 인연이 발전한 결과가 고창방문이었다. 오 선생님이 일본에 돌아간 후, 블로그에 이렇게 메시지를 남겨 주었다. “행복은 스스로 쌓아 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며칠 함께 지내보면서 이 갑작스러운 손님은 정직한 인생을 걸어온 분이고, 거짓이 없는 성실한 인품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다. 필자가 쓴 글을 높이 평가해 주고, 고창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만나러 와주신 분이, 이런 분이었다는 것이 고맙고 행복하다.
필자는 블로그 이외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하지 않지만, 블로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것을 하기 때문에 결국은 연결되어 있다. 작년 해피데이고창에 올린 ‘오체불만족의 추억’이라는 칼럼기사가 있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오체불만족>의 저자인 오토타케 히로타다씨에게 도달하여 그가 기사를 읽어 주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알려 주어 고마워요”라는 연락이 왔다. 발신만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통감한 6월의 바쁜 날들이었다.
知らない人と繋がる時代
日本に向けてほぼ毎日ブログ記事を書いている。私が書く内容は書籍のことと教育のことが多いが、高敞のこともたくさん書いた。そのためブログに高敞観光に関する質問が見知らぬ人から入る。先日もブログを通して日本のラジオ局から取材依頼が来た。「国際結婚特集をするのでお話を聞かせてください」ということだった。なぜうちのブログを選んで声をかけたのですかと訪ねたところ「国際結婚ブログの上位ランキング者の中から選びました」という答えが返ってきた。全く知らない人から、こうして声がかかるというのが本当に不思議だ。ネットに接続できる人なら誰でも閲覧できるのだからありうることなのだけど。
ブログにこまめにレスをいれてくれる年輩の男性がいた。ハンドルネームからしても在日韓国人の方だというのは明らかだった。彼が韓国の埋葬に関して知りたいと思いネット検索したところ、親戚の韓国式土葬を長い記事にして写真付でアップした私の記事に出会ったそうだ。その方のご両親の出身は慶南の密陽で、そちらには何度か足を運んだそうだが、全羅道には何の縁もなかったそうだ。私が繰り返し書く高敞の記事を見て「いつか高敞を訪れたいと思っています」との言葉があがっていた。しかしその方の年齢はもう70代である。私はそれが実現するとはほとんど信じてなかった。
ところが先日ブログのメッセージ欄に彼から「何月何日に高敞に行きます」というメッセージが入った。この方は私の電話番号もフルネームもろくに知らずに、飛行機で釜山に到着しバスを乗り継いで高敞までいらした。その足でまっすぐ郡庁観光課に向かい、「えみこさんの連絡先を教えて欲しい」と頼んだそうだ。私の夫の姓は全州李氏なのだが、なぜかヨンチョンのチェ氏と勘違いしていたため少し手間取った。それでも郡の職員さんたちの親切な対応の結果、ちゃんとわが家までいらっしゃることが出来た74歳の呉先生である。観光課のユ・ヨンラン氏の「時間があればわが家にもどうぞ」との言葉に呉先生は感嘆していた。わけもわかぬまま高敞におりた呉先生の心に、その一言は深く刻み込まれたはずだ。暖かい対応に感謝する。
韓国では「父母の日」に親孝行を表現するが日本ではそれを「父の日」と「母の日」にわけて行う。「父の日」は6月に祝うものだが、呉先生の子供たちが「父の日」のプレゼントとして「高敞旅行」を贈ってくれたため急に高敞に来ることが決まったのだという。ブログ記事で「金曜・土曜」の高敞邑城パンソリ公演を御存じであったのでちょうど週末にあわせて来てくださった。「高敞で行きたいところはどこですか?」と伺うと、なんと雲谷湿地に行きたいとおっしゃる。高敞に保護動物のかわうそが生息しているのを御存知だったのだ。ご親戚にかわうその研究者がいるのだという。夫の運転で湿地帯をぐるりと巡った。かわうそは目にす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が。
ほぼ二日間、呉先生はわが家の家族と行動を共にした。うちの子供たちには「即席おじいちゃん」が出来、呉先生はうちの子ととても仲良くなった。在日韓国人でも二世三世になると韓国語できない方の方が多いくらいだが、呉先生は慶南のお年寄りのような韓国語を喋る。わが家の末っ子が「おじいちゃん、はやくー」と呼び掛けると「オニャー」と応えるくらいなのだから。呉先生は朝鮮で生まれてまだ赤ちゃんの時家族で日本に渡られたそうだ。育ったのは日本。しかもある時期までの教育は完全な日本語。そして日本の敗戦で民族のアイデンティティ問題が再浮上し、韓国語を勉強する道を模索したそうだ。このように二国間を行ったり来たりした人間の精神は揺れざるを得ない。自分が一体どこの国の人間なのか時々分からなくなり、その狭間で揺れる気持ちを抱えながら生きることになる。20代の終りに韓国に嫁いできた私も同じである。こうして韓国での生活が長くなればなるほど、韓国人の気持ちに同調することもあれば、嫌な面を深く知り反発することもある。一体自分はどちらの人間なのか分からなくなる時がある。自分のブログにはそういうことも含めて「韓国で生きる一人の日本人の内面」を正直に綴ってきた。呉先生は、その中にご自分との共通点を感じられたのに違いない。
こうして出会うはずのない人間同士がブログで出会った縁が発展しての高敞訪問である。日本に帰った後に、また呉先生はブログにメッセージをいれてくれた。「幸福とは自分で積み上げることができるものだと信じたい。」数日共に過ごしてみて、呉先生の嘘のない誠実なお人柄を感じた。足に地のついた実直な人生を歩んできた方だったということもわかった。私の書いたものを誉めてくれて、ここまで直接会いに来てくれた人がこういう人であったことの幸せに心底感謝したのである。
私はツイッターもフェイスブックもやらないが、ブログの訪問者たちがそれをやっている関係で勝手につながっている。去年ハッピーディ高敞に書いた「五体不満足の思い出」というコラム記事もフェイスブック繋がりで著者の乙武洋匡氏が読んでくれた。知人を通して「知らせてくれてありがとう」という連絡が入った。自分の方から発信さえしておけば、一体どこでどうなるか分からない時代なのだということを痛感した6月の忙しさ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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