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 임진왜란 당시 기록은 그리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전라도를 공격하지 않았고 이순신 장군이 서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서남해안 제해권 장악은 결국 왜군과 명 간의 길고 긴 화의를 이끄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왜와 명의 화의 실패는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왜군의 재침을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그 시기는 1597년 1월 15일(음력)부터 1598년 11월 18일까지이다.
1차 전쟁인 임진왜란은 고창지역에 왜군이 침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기사가 없다. 그러나 2차인 정유재란은 짤막하게나마 고창현감 문희개(文希凱, 1550~1610)의 기록을 통해 볼 수 있다. 그 기록은 「호남절의록」과 「조선왕조실록」 선조 대에 있다.
먼저 문희개에 대해 「호남절의록」은 “문희개의 자는 순거(舜擧), 호는 용호(龍湖), 본관은 남평, 충선공 강성군 익점의 후손이고, 증참판 위천(緯天)의 아들이다. 선조 9년(1576)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임진란 때 작은 아버지 풍암공(文緯世)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을 거느리고 적을 참살한 공이 있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고창현감을 제수 받았다. 정유란(1597) 때에 왜적이 갑자기 와서 성을 포위하니 공은 아들 익명(益明)·익화(益華)와 함께 성 안의 사람들을 모아서 적을 막아 싸우다가 갑자기 적의 칼을 맞아 크게 다치니 공의 아들 익명이 공을 업고 진중에 들어왔다. 가동인 강룡 등 10여명과 이민 100여명과 함께 죽을힘을 다해 적을 물리치니 한 읍이 그로 인해 보전할 수 있었다”라는 기록이다. 또한 동서(同書)의 문희개의 아들 문익명 편에는 “정유란 때 아버지인 현감공이 고창에서 적을 방어했는데, 적의 칼에 상처를 입었다. 공은 동생인 주부 익화와 함께 칼날을 무릅쓰고 적진에 들어가 가동인 강룡의 무리 10여인과 함께 전투를 독려하여 적을 물리쳤다. 그 일이 알려져 특별히 좌랑을 제수 받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정유(1597) 10월 13일 전라관찰사 황신이 “…고창 현감(高敞縣監) 문희개(文希凱)는 왜적이 본도에 침범하자 남원이 함락되기 전에 관아를 버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지금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하고, 같은 날 관아를 버리고 도피한 수령들을 등급을 달리하여 처벌하기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 고창 현감 문희개는…그 죄가 여러 수령 중에서도 가장 중하여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선전관을 보내서 찾아서 잡아다가 법으로 다스려 여러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일깨워야 합니다…”라고 보고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동년 10월19일 기록이 있고, 12월 9일에도 계속해서 문희개의 죄상이 나온다. 이때는 비변사에서 도망친 수령들의 정상 참작, 재기용 등에 대해 선조에게 아뢰었다. “…또 정응탁(鄭應鐸)·이곡(李穀)·박지술(朴知述)·유대희(兪大橲)·남절(南巀)·송남수(宋枏壽)·문희개(文希凱)·이산휘(李山輝)·정지(丁至)·한수성(韓守性)은 모두 음관(蔭官)이니 납속(納粟)도 하게하고 운량(運糧)도 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부유(腐儒)인 음관에 대해서는 더욱 쓸 곳이 없으니 이런 혼잡한 서계(書啓)는 우선 놔두고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선조는 이들 음관은 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벼슬을 한 사람으로 썩어빠진 선비로 아무 쓸 곳이 없는 사람들이라 표현하고 있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은 1799년 송광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편저자를 알 수 없다. 본 서는 총 12권 5책으로 되어 있으며, 임진왜란에서 이인좌(李麟佐)의 난까지 의거를 일으킨 호남사람들의 의로운 행적을 수록한 책이다. 본서를 통해 호남지역의 의병인물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료이나, 문제는 사실과는 다른 잘못된 내용이 꽤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는 점이다(김동수, 2011).
문희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장흥일대의 문씨들과 하나 되어 의병항쟁을 시작했고, 그 결과로 1593년 작은 아버지 문위세는 용담현감에, 문희개는 고창현감을 제수받았다. 고창현감 문희개는 1597년 음력 8월 왜군이 남원성을 공격한다는 첩보를 받자마자, 고창읍성을 버리고 장흥으로 도망해 버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그 사료적 가치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로, 누구나 인정하는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 왕조실록은 사관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가하여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 처리하는 것을 사실대로 기록한다. 이러한 사초는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관 이외에는 왕이라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다. 따라서 문희개에 대한 호남절의록의 기록을 보면, 정유재란 전인 임진왜란의 의병활동은 여러 정황상 인정될 수 있으나, 정유재란 발발 이후 고창읍성 전투 기록은 왜곡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물론 문위세는 많은 공을 세워 용담현감을 거쳐 1600년 파주목사를 제수 받았으나 병이 있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그를 병조참판으로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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