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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사(綠沙)마을의 유래
이기화(고창지역학연구소장) 기자 / 입력 : 2013년 01월 11일(금)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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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 읍내에서 동쪽으로 1마장 거리에 동남좌향으로 설기된 마을 천혜적으로 동북류의 물 흐름이 비옥한 옥토를 충적시킨 동네이다. 이 마을의 어귀는 고창 직행 신작로와 흥덕 행의 갈림목으로 짜여 있다.
조선후기에 의정부의 기록전문직이던 녹사(錄事)벼슬을 마감한 세종대왕의 11남 의창군(義昌君)의 후손인 선비 한 분이 이곳에 내려와 강촌에 은거하며 여생을 마친 인연으로 그 후손들이 터를 누르고 녹사동, 녹사래(錄事來)로 떵떵거리며 국록을 받은 녹사벼슬이 냇가 모래를 즐기며 살았다 하여 구한말에는 녹사(祿沙)마을로 굳어진 것이다.
1914년 3월 1일 일제강점기의 부군(府郡) 통폐합령 때 조선국록을 받았던 녹사벼슬아치가 머문 곳을 지워버리고자 녹자를 초록빛 녹(綠)으로 갈아치워 민족혼을 말살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한림동, 녹사리 동문(東門)리, 동부리, 복룡촌(伏龍村)까지 버무려 동사리(東沙里)로 병합, 12개 법정리의 머릿 마을로 추켜세웠다.
역사적으로 녹사벼슬은 고려 때에는 문하부(門下府)의 종7품으로 간쟁(諫諍)의 사건기록을 도맡아 선악을 조사하는 관리였는데 조선조에서는 문반(文班)의 관청인 동반직(東班職)은 의정부에서 무반(武班)의 관청인 서반(西班)직은 중추원(中樞院)에서 파견하여 서무(庶務)의 전문직과 그곳의 정보업무를 겸하던 하급 이속(吏屬)이었다.
재직임기(1년5개월)가 만료되면 종6품의 새 품계(品階)를 받았는데 그때 만일 사관(仕官)직이 없으면 품계를 올려주지 않았다. 퇴관하여 지방수령의 채용고시에 입격되면 현감 발령을 임명했다. 읍지(邑誌)의 수령난에 무(武)반 출신이 많은 것은 무과 출신보다 녹사의 퇴물들이 채용시험을 배경으로 연줄을 대고 온 음사(陰仕)직이다.
구한국의 행정지명표에 엄연히 녹록(祿)자와 모래사(沙)로 확인되고 있어 일제가 둔갑시킨 초록록(綠)의 의미는 우리의 혼을 뺏어간 일본의 간계임을 명심해 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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