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문(烈女門)고개의 유래
향토서사시(75)
성내면 소재지에서 동북간으로 1.5km 거리
조동(槽洞)마을의 동쪽 고갯마루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의 선비 황응중(黃応中)이 23살에 요절하자
비통함에 젖은 부인 전주최씨(全州崔氏)가 방문을 걸어 잠근 뒤
식음을 전폐하고 가례(家禮)를 쫓아 여필종부(女必從夫)를 결심하니
절개를 꺾지 못해 열흘 만에 남편 뒤를 따라 순절(殉節)하였다.
이 갸륵한 정절(貞節)이 나라에 알려져 정문(旌門)이 내려짐에
이 고갯마루에 정려(旌閭)를 세워 그 뜻을 기려오니
이름 지어 열녀문 고개로 흠앙하는 뜸까지 생겨났다.
아무리 뛰어난 효녀라도 죽은 뒤에 열녀(烈女)를 호칭하게 되고
가상한 효부(孝婦)라도 사(死)후에 열부(烈婦)가 되는 것이다.
열녀는 가히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켜내야 하고
결코 열불이경(烈不二更)하는 아낙네라야 하는 조건이 필수였다.
지금 벽골제(碧骨堤) 앞 광장에 서있는 어느 가수의 효열비를 두고
지아비도 없는 처녀더러 열녀라니 기절초풍할 일이다.
5백년의 역사를 지탱해온 힘이 삼강(三綱)의 도리를 지켜낸 것인데
예상왕래(禮尙往來)의 계훈(戒訓)을 일깨워야 할 것인지
막나가는 세상이니 오불관언(吾不關焉)해야 할 것인지, 막막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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