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군이 결국 ‘전봉준 장군 생가’ 철거를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오는 추경부터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철거를 계획하고 있다. 1850년대 전봉준 장군이 살던 초가삼간을 고증도 없이 방 5칸짜리 집으로 복원한 것이다. 초가살이를 하던 농민계층에겐 꿈도 못 꿀 집이었다. 주소도 잘못됐다고 한다. 2001년 건립되자마자 잘못 복원됐다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지만 18년이나 걸렸다. 전봉준 생가터로서는 문화재적 가치가 높았지만, 생가가 잘못 복원됐으니 문화재 지정도 받을 수 없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과장된 성과주의가 만들어 놓은 번지르르한 흉물인 셈이다.
오히려 눈을 사로잡는 것은 작고한 신영복 교수가 쓴 노래비석이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마라 / 녹두꽃이 사라지면 / 청포장수 울고간다 // 새야새야 파랑새야 / 전주고부 녹두새야 / 어서바삐 날아가라 / 댓잎솔잎 푸르다고 / 하절인줄 알았더니 / 백설이 펄펄 / 엄동설한 되었구나.” 생가터 옆엔 민간에서 운영하는 전봉준 전시관이 있어 그나마 온기를 간직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에서 우리 근대 일상에 이르기까지 아기자기하게 꾸며놨다.
고창군은 지난 2001년 3월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에 ‘전봉준 장군 생가’를 복원했다. 부지면적 2813제곱미터에 본체와 헛간 등 건축면적 65.57제곱미터로, 1억293만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 안채 1동과 헛간 1동 등 모두 2동의 건물이 복원됐는데, 안채는 정면 2칸, 측면 5칸의 초가지붕으로 된 가옥형태다. 전봉준 장군은 1855년 12월3일 고창군 당촌마을에서 태어나 13살까지 살았는데, 생가는 동학농민혁명 기간에 모두 소실됐다.
그러나 생가 건립이후 고증 없이 건축됐다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문화재 전문가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고증 없이 졸속으로 진행하면서 ‘생가 복원의 대표적 실패 사례’라는 오명을 남겼다. 이기화 전 고창문화원장은 “5칸집으로 건축된 현 생가는 당시 지주계급들이 살던 집이었다”며 “전봉준 장군 경호원이었던 고 김흥섭 등의 증언에 의하면 생가 규모는 2칸 툇집이었고, 부엌을 합해도 3칸집이었다”고 설명했다. 근시안적 행정으로 역사적·문화적 가치만 상실된 셈이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도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가난한 혁명가의 생가가 이런 규모냐는 민원들을 제기해, 동학관련단체나 군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2001년 당시 고창군은 이에 대해 “건축설계 당시 문헌이나 사료 등 고증 자료가 없어, 생가터 인근 건축 형태와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참고했다”고 말했지만, 현지를 방문한 문화재 심의위원들은 “현 생가는 고증을 거치지 않고, 너무 크고 화려하게 건립해, 역사적 가치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생가 위치도 잘못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전봉준 장군이 고창군 당촌마을에서 태어나 살았다는 것을 밝혀낸 이기화 전 원장은 “현 생가는 당촌마을 6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관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촌리 63번지가 생가터였다”며 이에 대한 검증도 뒤따라야 한다. 이기화 전 원장은 “관 주도의 관제문화가 만든 역사 왜곡행위”라며, “지금에라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에 고창군은 ‘전봉준 장군 생가’를 철거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생가터 표석을 설치하는 등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작업에 나선다고 한다. 군청 관계자는 “동학혁명 유적지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전봉준 장군 생가 철거도 계획하고 있다”며 “올해 추경부터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올해나 내년쯤 작업이 것 같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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