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주간해피데이 | |
판소리 여섯바탕을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 선생(1812~1884)의 사설과 가사 전체를 필사한 고서가 115여년 만에 세상에 공개돼, 판소리 연구의 새로운 전기와 함께 판소리의 고장 고창군민들에게 자부심과 기쁨을 주고 있다.
신재효의 가장 높은 업적은 당시 구비전승되는 서로 다른 판소리 사설들을 집대성했다는 점이다. 그는 춘향가를 ‘동창’(아이가 부르는 판소리)과 ‘남창’(성인남성이 부르는 판소리)으로 나눠 따로 집필했으며, 특히 ‘변강쇠가’는 그가 아니었다면 그 구체적 내용이 전해지지 못할 뻔했던 작품이다. 이를 ‘신재효 사설본’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신 이 ‘사설본’과 신재효 가사를 보고 필사한 2차 자료가 여러 판본들로 전해지고 있다. 이를 가리켜 (고창)읍내본(邑內本), (고창)성두본(星斗本), (고수)와촌본(瓦村本) 등으로 부른다. 이 필사본들은 완질로 전해지지 않았고, 특히 ‘동창 춘향가’는 전해지지 않았다. 당시 고창에 있던 이 필사본들을 보고 연구자들이 다시 편찬한 3차 자료들을 가람본(이병기), 새터본(강한영), 김삼불본 등으로 부르고 있다.
삼농당 박경림 선생이 1900년대 초 필사한 소위 ‘청계본’은 이병기의 제자인 김삼불이 6·25전쟁 중 월북한 이후에는 판소리계에서 잊혀져 있었다. ‘청계본’과 관련된 기록은 시조(時調) 시인으로 유명한 가람 이병기 선생의 ‘가람일기’ 중 1932년 8월17일 기록에 처음 나온다. 이병기는 “고창군 고수면 평지리의 박헌옥(朴憲玉)씨의 집에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이 모두 있다”고 적었다. 그 뒤 가람의 제자 김삼불(金三不)이 박헌옥씨가 소장한 판본으로 ‘옹고집전’을 1950년에 출판하기도 했다. 판소리학계에서는 전쟁 중 월북한 김삼불이 ‘박헌옥 소장본’을 함께 가져갔거나 그 과정에서 망실(亡失)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청계본이 발굴된 내력
김삼불은 월북하면서 판소리 연구자료를 동료교수에게 맡기고 갔다. 이 자료조차 70년 동안 묻혀 있었다. 최근 고창군에서 동리총서를 발간하는 움직임 속에서 이 자료가 세상에 나왔고, 판소리학회는 김종철 교수(서울대 국어교육과)에게 이 자료에 대한 해설을 부탁했다.
김종철 교수는 이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적벽가 앞에 빨갛게 쓰여진 ‘청계본’이라고 생경한 단어를 보았다. 판소리 연구자로서 생전 처음보는 단어였다. 고창 지도를 찾아보니 청계저수지가 있었고, ‘청계본’이란 ‘박헌옥 소장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박헌옥 소장본’이 망실됐다고 추정됐지만, 김삼불이 계속 ‘박헌옥 소장본’을 인용했기 때문에, 김 교수는 한번 ‘박헌옥 소장본’ 즉 ‘청계본’의 존재 유무를 직접 수소문해 보기로 했다.
김 교수는 고창지역 향토연구가인 이병렬 박사(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에게 ‘고수면 박헌옥’이란 실마리로 ‘청계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 박사는 박종은 고창예총 회장(전 고창교육장)이 떠올라 연락을 취했으며, 천운이 통했는지 마침 박종은 회장은 박헌옥 선생의 손자였고, 박종은 회장은 전대로부터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으며, 종형인 박종욱씨가 필사본을 포함한 고서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때가 8월31일이었다.
그 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김 교수는 9월2일 고창으로 왔다. 그리고 성송면 학천마을 박종욱씨(80) 댁에서 판소리계의 보물인 신재효 사설 전집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박종욱씨는 좁은 마루에다 열 권의 필사본을 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 교수와 이 박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책을 카메라에 담고, 박종욱씨는 중복되지만 먼저 썼던 거라며 ‘심청가’ 한 권을 또 찾아왔다. 김 교수가 집안 고서적을 보관해 온 상자를 낱낱이 꺼내보고 ‘조성가’를 한 권 더 찾아냈다.
청계본의 문화재적 가치
소장자인 박종욱씨는 저수지 조성으로 청계동을 떠나는 와중에도,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청계본’ 등 고서적이 들어있는 궤짝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박종욱씨에 따르면 “증조부님은 못 뵈었고, 할아버지가 고령으로 돌아가시면서 ‘이건 아주 필히 잘 간직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박종욱씨가 이토록 소중하게 잘 지켜냈기 때문에 이 자료가 존재하고, 결국 ‘청계본’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청계본’이란 명칭은 고수면 평지리 청계동에서 따온 것으로 김삼불이 붙인 이름이다. 이 청계본은 박헌옥씨의 부친 박경림(朴坰林, 1864~1932) 선생이 주로 필사했다. 1906년 ‘심청가’를 시작으로 대부분 1910년을 전후로 필사됐다. 필사 시기는 신재효 사설의 읍내본(邑內本), 성두본(星斗本), 와촌본(瓦村本)과 비슷한 시기다.
‘청계본’의 가장 큰 가치는 무엇보다 신재효 사설본을 모두 갖춘 완질(完帙)이라는 점이다. 현재 고창판소리박물관에 보관된 읍내본과 성두본은 일부 작품들이 누락됐고, 고창문화원에 있는 와촌본은 작품이 2편뿐이다.
그동안 신재효 ‘사설본’ 원본은 없고, 2차 자료인 필사본은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필사본을 집성한 3차 자료인 ‘가람본’이 가장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청계본’에 판소리 여섯바탕(동창 춘향전 포함)과 신재효가 직접 지은 가사·잡가·타령도 모두 들어있기 때문에, 2차 자료로서 사료적·학술적 가치가 가장 높을 수밖에 없다.
청계본은 우선 ‘동창 춘향가’, ‘남창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토별가’, ‘박타령’, ‘횡부가’(변강쇠가) 등 신재효의 판소리 여섯바탕 사설을 모두 갖추고 있다. 특히 필사본에는 없는 ‘동창 춘향가’가 소장돼 있으며, 조선말 유행했던 ‘숙영낭자전’과 김삼불이 출판했던 ‘옹고집전’도 원래 모습대로 간직돼 있다.
여기에 신재효가 직접 지은 ‘허두가’, ‘성조가’, ‘오섬가’, ‘도리화가’ 등의 작품도 다 갖추고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아울러 일부 작품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으나 전반적으로 상태가 양호하며, 내용의 누락 없이 달필(達筆)의 필체로 필사된 선본(善本)들이라는 점도 청계본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김종철 교수는 “무엇보다 전집이 온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가치이며, 두 번째는 신재효의 사설들이 어떤 계통으로 형성돼 있는가를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라면서 “(필사한) 박경림 선생이 판소리 전반에 대해 관심이 많고, 당시 자료를 다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소장자인) 박종욱 선생의 부친(박홍균)이 1930년대에 남창 춘향가를 다시 필사하는 등 밀양박씨의 판소리 향유와 관련한 연구도 필요하다”면서 “4대에 걸쳐 소중하게 보관돼 오던 것을 흔쾌하게 고창군과 판소리계를 위해 내놓으신 점, 거듭 감사의 말씀의 드린다”고 말했다.
한편, 9월18일 오전 10시 군청 2층 상황실에서는 소장자인 박종욱씨와 기탁자인 박종욱·박종은·박종식씨가 ‘청계본’(13점)을 고창판소리박물관에 기탁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소장자·기탁자를 비롯해 박종연 대표(제이와이북스)와 밀양박씨 청재공파 문중, 김종철 교수, 이병렬 박사, 유기상 군수와 송영래 고창문화원장 등 많은 축하 인사가 참석했다. 고창군은 김종철 교수와 이병렬 박사에게도 감사장을 전했다.
기탁자 중의 한 명인 박종은 고창예총 회장(전 고창교육장)은 “종형 댁에 동리선생 필사본이 간직돼 있는줄 알았지만, 이병기 선생의 가람본 등이 있었기 때문에 필사본이 시중에 많이 있는줄 알았다”면서 “이제라도 김종철 교수의 혜안과 집념으로 발굴됐으니, 고창군의 자랑이 되고 학술적으로 많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병렬 박사(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는 “고창에서 청계본이 유지되고 지켜졌고 나왔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면서 “판소리 연구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무엇보다 고창이 판소리의 성지임을 증명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고창군은 기증 받은 ‘청계본’을 영구 보존하기 위한 작업과 함께, 전문가 및 판소리계의 자문을 받아 문화재 등재를 추진할 계획이다.
유기상 고창군수는 “청계본이 발견됨으로써 고창이 낳은 동양의 셰익스피어 신재효 선생의 판소리 연구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게 됐다”며 “고창을 사랑하는 소장자의 후의로 청계본을 위탁·관리하게 된 고창판소리박물관 역시 전국 유일의 판소리박물관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높이게 됐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