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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학연구회 오강석 사료조사위원은 8월28일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高敞 禪雲寺 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의 東을 銅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4년 보물로 지정된 이 마애여래좌상은 고려 공민왕 때 면상(面像)에 구리 주물을 씌우고 머리 위에 청자기와를 올린 보호각과 공중누각 형태의 암자를 지으면서 하도솔암(下兜率庵) 또는 동불암(銅佛庵)이라 불렸다. 이 암자는 1648년 구리주물이 떨어질 때 파괴되어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가, 1969년 5월28일 한 나무꾼이 발견·신고하여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했다. 오 위원은 “이때 담당자가 나무꾼이 말하는 동불암의 동(銅)을 음이 같은 동(東)으로 오기했다”며, “문화재로 등재할 때도 오류를 수정하지 못한 이유는 문헌조사를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에 <송사지>와 <전선원무장읍지> 등 여러 문헌에 동불암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었으므로, 문헌조사를 시행했다면 어렵지 않게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고려 초·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여래좌상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규보의 <남행일월기>(南行日月記)이다. 1200년 3월 해리 쪽에서 무장으로 가기 위해 도솔산을 넘던 이규보는 <남행일월기>에 “길가에 바위가 있고, 바위에 미륵상이 우뚝 서 있는데, 자세히 보니 바위를 쪼아 만든 것이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로써 이 마애여래불이 1200년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것과 1200년에는 동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마애여래좌상이 동불(銅佛)이 된 시기를 밝힌 것은 이재 황윤석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후기 실학자 강후진이었다. 강후진은 <송사지>(松沙誌)에 “銅佛庵在五層殿下 高麗恭愍王時始創(동불암재오층전하 고려공민왕시시창; 동불암은 오층전(현재 내원궁 부근으로 추정) 아래 있는데 고려 공민왕 때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이규보가 1200년에 보았던 ‘바위에 새겨진 미륵상’이 공민왕(1351~1374) 때 ‘동불’이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만들 때부터 ‘동불암’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보면 마애여래좌상의 얼굴에 구리 주물을 씌울 때 머리 위의 가림막과 암자를 함께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 위원은 그 근거로 마애여래좌상 아래 하도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는 <도솔산선운사지>(兜率山禪雲寺誌; 선운사, 2003, 270쪽)의 기록과 3차에 걸친 마애여래좌상 실측조사 때 발견된 기와편 및 배수시설이 발견된 것을 예시했다.
불상의 어느 부위에 구리 주물을 씌웠는지,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선원무장읍지>(全鮮元茂長邑誌), <무장현읍지>(茂長縣邑誌), <무장읍지>(茂長邑誌), 규장각 발행 <전라도읍지>(全羅道邑誌) 등 여러 문헌에 아래와 같은 동일한 내용으로 수록되어 있다.
銅佛庵 兜率庵下 石壁屹立千百尺 동불암 도솔암하 석벽흘립천백척 / 刻丈六佛像於石壁 而面像則鑄銅而掛之 각장육불상어석벽 이면상측주동이괘지 / 極其雄壯 不知何時鑄 극기웅장 부지하시주 / 成至順治戊子年 大風時墮地 성지순치무자년 대풍시타지 / 片碎聲聞數十里 其上棟宇所架 편쇄성문수십리 기상동우소가 / 石穴及刻印佛像 至今猶存 석혈급 각인불상 지금유존
동불암은 도솔암(상도솔암) 아래 아주 높은 석벽에 새겨져 있다. / 석벽에 새긴 사람 키 여섯 길이나 되는 불상으로, 면상에 구리를 녹여 부은 주물이 씌워져 있다 / 매우 웅장한데, 언제 구리 주물을 씌웠는지는 알 수 없다. / 청나라 순종이 통치하던 무자년에 태풍으로 땅에 떨어졌는데 깨지는 소리가 수십 리 밖까지 들렸다. / 나무 기둥을 박았던 돌의 구멍과 새겨진 불상은 지금도 남아있다.
위의 기록은 마애여래좌상을 동불이라 부른 이유가 불상의 ‘면상에 구리주물을 씌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그 구리주물이 사라진 시기와 이유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시기가 청나라 순종이 통치하던 무자년 즉 인조 26년(1648년)이라는 것과 원인이 ‘태풍’이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 <조선왕조실록>( 1648년 7월6일 음력)에 신뢰할만한 기록이 실려있다.
이날 전라도에 태풍이 불었는데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에 불기 시작해서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그쳤다. 지붕의 기와가 날아갔고 큰 나무가 부러졌으며, 곡식이 손상되었다. 부안현(扶安縣) 변산(邊山)의 소나무가 무수히 뽑혀 쓰러져 산길을 메웠으므로 사람이 다닐 수가 없었다. 노령(蘆嶺) 이상의 피해가 더욱 혹독했다.
세계 최고의 기록문화유산다운 소상한 기록이다. 1648년 이 지역에 태풍이 불었다는 다른 기록이 없으므로 ‘1648년에 동불이 땅에 떨어져 깨졌다’는 날은 7월6일로 특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도솔암 서쪽 50여 미터 거리에 있는 이 마애여래좌상은 높이 15.7미터 무릎너비 8.5미터의 국내 최대 마애불상이다. 길가에서 보면 절벽 위쪽에 얼굴이 훤히 보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손화중포 무장 동학도들이 이 마애여래불의 복장 비결을 꺼낸 사건은 온 국민이 아는 사실. 불상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신고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이는 당시 문화재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마애여래좌상은 신고 직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고 1994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오 위원은 문화재로 지정되는 과정 또한 발견만큼이나 허술했다고 지적한다. 선운사에서 동불암과 관련이 있는 시설은 선운사, 내원궁, 도솔암이다. 동불암(東佛庵)이 되려면 마애여래좌상의 위치가 세 곳 중 어느 한 곳의 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어느 곳에서도 동(東)이 아니라는 대목에서 문헌조사에 나섰어야 했다는 것이다.
고창학연구회는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부위에 구리 주물을 씌웠다는 실체적 증거를 찾기 위해, 지난 7월 3회에 걸쳐 정밀 드론촬영을 실시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은 결과, 동불암 관련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첫째, 얼굴 부위에 집중된 20개의 구멍들은 나무기둥을 박았던 가림막의 구멍에 비해 크기가 현저히 작아 철제를 꽂아 구리 주물을 고정시켰을 것으로 보이며, 문화재 보수 전문가들은 현재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왼쪽 눈 옆에 꽂혀있는 두 개의 철편을 보면 구멍에 삽입한 철물들이 목재를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이다.
둘째, 1995년 부여문화재연구소의 실측조사 때 발견된 쇠못과 쇳덩이 들이 크기로 보아 안면부의 구멍과 관련성이 깊다고 판단된다.
셋째, 안면부의 구멍이 좌우 대칭적으로 뚫린 것이 동판의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한 안배로 보인다는 점이다.
넷째, 얼굴 부위 암석 변색 부분이 구리 부착으로 인한 산화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어 추후 관련 기관에 조사를 의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해, 문헌 자료 및 정밀 촬영한 마애여래좌상의 안면 부분 사진을 검토한 최선주 교수(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전 국립경주박물관 관장)는 “고려말 도솔암 두건형 금동지장보살이 조성된 후에 그 영향을 받아 마애불 얼굴 부분에 청동주물을 만들어 걸었던 듯하다. 특히 안면의 바위 일부는 구리주물의 영향으로 변색된 것으로 보여 정밀조사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구리 주물을 안면에 부착한 방법, 이전 조사에서 수거된 철정과 철 뭉치의 용도 등에 대한 심도 있는 조사가 필요하며, 보물의 관리 주체인 지자체에서 미술사 전문 연구자들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정확한 고증을 거쳐 후속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고창학연구회는 위의 근거를 바탕으로 2024년에 고창군과 문화재청에 동불 관련 학술세미나 개최를 건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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