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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면 부곡리 연동의 횡혈식석실분을 통해서 본 백제 모양부리현(毛良夫里縣)
<살며 생각하며>
이병열(고창문화연구회 기자 / 입력 : 2012년 07월 25일(수)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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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연동마을에는 고려장이라 알려진 고분이 있다. 이는 고려장이라기보다는 삼국시대의 고분이라 함이 옳다. 부곡리는 주진천의 지류인 고수천을 따라 형성된 하천평야를 끼고 낮은 구릉이 이어진 지역이며, 배후에는 시루봉이라 부르는 증산(甑山)이 있다. 부곡리 고분이 위치한 연동마을 뒤쪽에 증산이 있다. 시루봉의 구릉 말단부 경사면에 비스듬히 자리 잡은 이 고분은 오래전에 도굴되었으나 한 기의 고분 매장시설은 비교적 잘 남아있는 편이다. 연도의 덮개는 인근의 묘지에서 축대로 사용하여 사라져 연도의 측면만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래도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는 매장시설은 네모반듯한 방형에 가까운 평면형태를 띠고 있으며, 할석으로 쌓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 石室墳)으로 천장이 2단의 반원모양(穹窿式)에 가깝게 형성되었다. 매장부의 석실은 가로 150cm, 세로 180cm 규모이며, 고분의 입구에서 시체를 안치한 석실입구까지 이르는 길인 연도(羨道)는 길이 460cm, 너비 70cm, 높이는 발굴을 해봐야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석실과 연도의 방향은 190˚이다. 이 석실분은 호남 서남부지역의 옹관묘 다음 단계에 축조된 것으로 백제 석실분 계통으로 보인다.

백제가 마한을 복속한 초기인 4세기말은 아산 봉덕리를 중심으로 한 마한의 모로비리국의 세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백제는 지속적으로 고구려와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었고, 특히 4세기 말 광개토대왕과 5세기 초의 장수왕의 등장은 백제가 남쪽의 많은 옛 마한의 재지 세력의 동참 없는 대고구려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마한의 옛 지역을 점령한 백제는 전략적 거점지역에 성을 쌓고 성마다 지방관을 파견했을 것이다. 파견된 백제의 지방관은 고구려와 사활을 건 전쟁을 하기 위해 재지 세력의 군사권 장악과 경제적 수취 및 역역동원(力役動員)의 감독 등과 같은 한정된 역할을 하였을 것이며, 마한의 재지 세력은 읍락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나 중앙과 지방을 연결해주는 역할에 한정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즉 백제는 4세기 중반 이후 근초고왕에 의해 전라도지역을 점령하지만 백제의 중앙권력이 전라도를 완전히 점령했다는 고고학적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백제의 정치․사회 변화의 양상은 묘제인 횡혈식 석실분을 통해 나타난다. 백제의 전라도 완전복속의 고고학적 근거는 5세기 중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 5세기 말(웅진도읍기, 475~538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백제 중앙묘제인 석실분은 마한의 전통적인 묘제인 옹관묘 사이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가 5세기 말이기 때문이다. 웅진도읍기의 동성왕과 무령왕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 풍요로운 호남지역의 완전 장악과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을 것이다. 호남의 경제력은 백제의 재부흥과 직결되는 중요한 선결과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견실한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서 반드시 호남의 주요한 거점들을 친인척 중심으로 지방의 권력 완전히 장악해야 했을 것이다. 백제의 중앙묘제인 횡혈식 석실분은 점진적으로 기존의 옹관묘 문화 속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은 서울의 방이동과 가락동의 석실을 통해 대체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의 적극적 도입은 웅진도읍기라고 생각한다. 즉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은 적석총이 등장한 다음에 등장한 백제 웅진도읍기의 대표적인 중앙묘제이기 때문이다. 백제의 적석총은 웅진도읍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백제가 웅진으로의 천도는 5세기 말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 패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묘제 변천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닌지 추측된다. 왜냐하면 웅진도읍기의 짧은 기간(64년)에 도읍인 공주 부근에서 완성된 궁륭식의 횡혈식 석실분이 채용되었고, 전통적인 고구려 계통의 적석총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즉 궁륭식과 같은 완성된 형태의 묘제가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새롭게 채용된 것인지, 한성에서부터 사용된 묘제인지, 아니면 지방에서 발달하였다가 중앙으로 유입된 것인지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여간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백제의 묘제의 특징은 첫째, 묘실 평면이 네모반듯한 방형(方形)에 가깝게 시설되었다. 둘째, 매장부(埋葬部)를 돌로 꾸미면서 별도의 입구와 매장부에 이르는 연도가 길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셋째, 내부의 천정 형식이 천정으로 갈수록 좁아지면서 둥그스름한 모습의 반원으로 만든 궁륭식(穹窿式)이라는 특징이 있다. 위와 같이 백제묘제에 있어 도읍의 천도는 시기별로 다양한 양식이 통일된 모습으로 등장하고 사라졌다. 한편 이러한 횡혈식 석실분은 백제가 사비로 천도(성왕 16년, 538년)한 이 시기를 전후로 도읍지의 유일한 묘제로 자리 잡고, 천정의 형식도 궁륭식에서 평천정으로 정착이 되었다.

고수면 부곡리 연동마을의 횡혈식 석실분은 웅진도읍기의 묘제 특징인 궁륭식의 채용과 긴 연도 및 방형의 매장부를 볼 때 백제의 웅진도읍기의 분묘로 추정된다. 즉 웅진도읍기의 대표적인 묘제인 횡혈식 석실분이 마한지역에 출현한 시기는 웅진 천도 후 국가의 위기를 수습하여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가 이루어진 때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창 연동의 횡혈식 석실분은 동성왕과 무령왕 재위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고창지역 삼한시대의 분묘로 추정되는 봉덕리의 분구묘는 구릉의 말단부를 장방형 형태로 다듬은 후 그 위에 성토하여 분구를 조성하고, 상부에는 석실분 5기와 옹관묘 2기를 안치하고 있는 방식으로 수혈식이라는 특징이 있다. 봉덕리 고분의 조성연대는 고분의 구조나 4호에서 출토된 남조대의 청자연대를 참고하면 5세기 초엽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는 고창의 모로비리국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복속된 369년 이후에도 100여 년간은 고창지방의 중심세력으로서 유지․존속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창의 부곡리 남고창I․C 부근에서는 2기의 청동기시대의 수혈, 원삼국와 삼국시대의 옹관묘와 분구묘 등이 발굴되었다. 이와 달리 연동마을 입구의 능선에서는 다수의 주거군과 횡혈식 석실분이 조사되었다.

2005년 서해안고속도로 현장인 고수면 예지리에서 원형이 훼손되지 않은 횡혈식 석실분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석실의 묘실은 가로 270㎝, 세로 150㎝, 높이 160㎝로 벽체는 장판석이고, 상부 덮개는 2장의 판석을 이용한 평천정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고분의 평천정을 통해 시기를 6세기말- 7세기 초 백제 사비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즉 예지리 횡혈식석실분은 묘실이 장방형이며, 오른쪽으로 편향되어 있는 연도를 하고 있는 석실분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이 예지리 횡혈실 석실분은 묘실의 벽석과 개석, 연도의 벽석과 개석 모두가 가공된 판상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또한 벽석과 천정의 연결부분을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거나 홈을 파기도하여 연결된 부분을 견고하게 하였다고 한다. 묘실의 횡단면은 육각형으로 전형적인 백제 사비시대의 횡혈식 석실분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고분은 부여는 물론이고, 익산, 전주, 정읍 등의 전북서남부권은 물론이고 멀리 전라남도 나주, 신안 등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시비시대기의 묘제는 백제의 중앙집권이 직접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추정할 수 있다. 즉 고창 부곡리 연동마을의 횡혈식 석실분은 예지리의 고분에 비해 시기적으로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백제의 모양부리현의 행정중심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가늠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모양부리현으로 추정하고 있는 지역에서의 궁륭식 횡혈식석실분은 필자가 아는 한 아직까지 연동 밖에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한 모로비리국의 중심지는 아산 봉덕일대로 추정되며, 백제 복속 이후 모양부리현은 고수면 부곡리 증산 아래의 연동부근에 현청을 개설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비도읍기(泗沘都邑期: 538~660년)에 들어서는 고창천과 주진천 변의 넓은 충적지를 적극적으로 개간하면서 태봉 아래 고성촌으로 다시 이전했을 것으로 추정해본다. 이에 대한 심층적 연구는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수정․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이병열(고창문화연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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