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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째의 임진년(壬辰年)
나카무라 기자 / 입력 : 2012년 02월 07일(화) 15:01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우리 가족은 1월초 일본 도쿠시마(德島)에 있는 친정집에서 2주 정도 있다가 왔다. 친정에 가면, 우리 가족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후) 제일 먼저 가는 곳이 조상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 가지 않으면 뭔가 불편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집안 묘지에 조선사람의 묘가 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듣고서 깜짝 놀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시대, 우리 조상이 조선에 출병해서 조선사람을 도쿠시마로 데리고 들어왔다고 한다. 전에 친정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그 때는 깊은 관심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번 일본 친정집 방문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고창을 침략한 일본인을 찾는 일을 계획했는데, 그로 인해 일본 우리 집의 이야기까지 뚜렷이 알게 된 것이다.

   
우리 집 묘지에 조선사람의 묘가 두 기나 있었다. 앉은 부처 형태의 조그마한 묘지석이었다. 하나는 머리 부분이 깨져 없어진 상태였다. 그 묘지석 옆면에 희미하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아마 일본에서 붙여진 일본이름이었던 것 같고, 물론 성씨도 없었다. 그 분이 언제 어디서 왔는지 등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남편과 필자는 가능하면 묘지석을 한국에 가지고 오고 싶었는데, 400년 이상 도쿠시마에 있었던 것을 쉽게 해외로 보낼 수도 없었다. 다음에 한국에서 갈 때 한국의 흙만이라도 가져다가 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조선인 묘 이야기를 일본 고모에게 말했더니, 고모는 “우리 시댁에도 그것과 비슷한 조선사람 묘가 5개나 있었다”고 하니 더 놀랬다.

   
나의 고향 도쿠시마에는 조선사람이 1천명 이상 연행됐다고 주장하는 기록도 있다. 우리 집에서 서쪽으로 40분정도 차로 달리면 가와시마초(川島町)라는 마을이 나온다. 거기에도 <조선녀(朝鮮女)의 묘>라고 써져있는 묘가 있다고 알게 됐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현지에 가보았다.

도쿠시마의 다이묘(大名)인 하치스카(蜂須賀)의 부하, 가와시마의 하야시(林)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출병했다. 그 때 사용한 마구(馬具)와 칼이 가와시마 신사(川島神社)에 봉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신사 옆 묘지에 조선여인의 묘가 있는 것이다. 지역의 노인클럽이 위령탑의 세워서 혼을 위로하고 있었다. 묘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 여인을 모신다>
여기 도감원(道感原)에 잠든 조선여성은 1597년 가와시마성을 지켰던 하야시(林) 도감(道感)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2번째 조선출병에 참전했을 때, 귀국하는 길에 시녀로서 수반동행(隨伴同行) 한 여성이다. 돌아보면 이국에 와서 그 생애의 막을 내린 사람으로써, 조국을 그리는 간절한 정을 금할 수가 없었을 것이 틀림없으리라. 우리 노인클럽에서는 회원들이 상모(相謀)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여기에 위령탑을 세워 이 여인의 영원한 명복을 비는 것이다.
<1990년 7월 가와시마초 춘추회>

묘비의 문장 중 <시녀로서 수반동행한 부인>이라는 표현이 있다. 실은 이것은 적절하지 않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조선여인의 생애를 생각하여, 이를 위령하고자 하는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눈을 돌리고 싶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왔던 조선인 포로의 수는 수만 명이라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일본의 정권을 장악한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이다. 2대 장군 도쿠가와 히데다다(徳川秀忠) 시대에는 조선과 일본의 국교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협의가 있었다. 일본으로 잡혀온 조선인 포로를 돌려보내 달라는 요청이 당연히 조선쪽에서 나왔다. 도쿠가와는 그 요구를 승낙하기는 했지만, 전국적으로 엄격한 포로 반환 명령이 나오지 않아, 결국 이때 돌아갈 수 있었던 조선인은 불과 1400명 정도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본에 연행된 조선인들 대부분이, 일본 아니면 팔려간 이국의 흙이 되었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출병의 이야기는 일본인 대부분이 아는 일본의 역사이다. 조선출병을 <나쁜 짓>이라 인식하는 일본인도 많다. 그러나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조선출병이 있었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아는 일본인은 많지 않다. 조선에서 수많은 사람이 잡혀온 것도 일부 전문가에게는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널리 알려져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 시집 온 나 자신도 우리 집 조상이 조선인을 포로로 데려왔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정도이다.

2012년은 1592년부터 420년이 되는 7번째 임진년이다. <역사는 반복한다>가 아니라 <역사에서 배운다>는 임진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도쿠시마의 다이묘인 하치스카가 밟은 한국 땅 전라도>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고, 고향 도쿠시마의 지방신문에 게재를 타진할 생각이다. 이것이 연행되어 일본에서 죽은 조선사람들에 대한, 필자가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위령이라 생각한다.     

 

나카무라 에미코(中村 惠実子) 씨는 일본어 강사와 통·번역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며, 고창읍에 살고 있다.

※다음은 이 글의 일본어 원본입니다

   

나카무라 에미코
(中村 惠実子)

7回目の壬辰年

 

1月上旬、家族で日本の徳島にある実家に帰省し二週間ほど滞在した。私は帰省する度に、まずは必ず先祖の墓地に墓参りに出向く。それを先に済ませないとどうにも落ち着かないのだ。そのわが家の墓所に朝鮮人の墓があることが今回の帰省ではっきり分かり非常に驚いた。わが家の先祖が秀吉の朝鮮出兵の時に兵士として出兵し、その時朝鮮人を連れて帰ってきたそうだ。以前にもなんとなく聞いたことがあったのだが、関心がなかったため上の空で聞いていたのだろう。今回朝鮮征伐の時、高敞に出兵した日本の大名を調査する過程で、わが家のことまではっきりした。

 

 朝鮮人の墓だという墓石がわが家の墓所に二つあった。人型の小さな墓石だった。一つは頭の部分が無くなっていた。かすかに横に名前が刻まれていたが、その名前はおそらく日本で必要によりつけられたであろう名字のない日本名であった。いつ連れてこられたのか朝鮮のどこから来たのかなどとの記録は全くなかった。出来れば韓国に返してあげたいが、400年もここにあったものを簡単に国外にうつすわけには行かない。せめて次の帰省のときに韓国の土を持ち帰って供えようと思う。朝鮮人捕虜の墓の話を叔母にすると「私の嫁ぎ先にも同じような朝鮮人の墓が5つある」というのでまた驚いた。

 

 朝鮮出兵で日本に連れて来られた朝鮮人捕虜の数は数万人だと言われている。豊臣秀吉が死亡し、その後日本の政権を掌握したのが徳川氏。その徳川家の二代将軍徳川秀忠の時、日朝の国交を正常化させるため両国間の協議が持たれた。朝鮮征伐で日本に連れ帰った捕虜を朝鮮に返すことが当然議題に上がった。朝鮮側の要望を徳川幕府が受け入れたものの、それほど厳格な命令が全国に下りたわけではないようで、結局この時に朝鮮に返された捕虜はわずか1400人ほどしかいなかったそうだ。日本に連行された朝鮮人たちの多くが朝鮮に帰れず、日本または売られた異国で土になったのだ。

 

 私の故郷徳島には朝鮮人捕虜が数千人連行されたという記録がある。実家から車で40分程西に走った川島町という地域にも「朝鮮女の墓」と書かれた墓があることが分かったので夫と現地に行ってみた。徳島の大名蜂須賀家政の部下である川島の林道感が朝鮮に出兵したそうだ。その際の馬具や刀が川島神社に奉納されたという記録があった。神社の横の墓所に、その朝鮮人女性の墓はあった。地域の老人クラブが供養搭を建てて慰霊してくれてあった。

 

 朝鮮人女性を祀る

ここ道感原に眠る朝鮮人女性は慶長2年(1597年)川島城番林道感が豊臣秀吉の朝鮮出兵に

再度参加して帰国する際侍女として随伴来日した婦人である。顧みるに異国に来てその生涯を閉じるや祖国を偲ぶ慕情の切々たるを禁じ得ないものがあったに違いない。わが老人クラブでは会員達が相謀の歴史を物語る昔を偲んで茲に供養塔を建設し同女性のとこしえと冥福を祈る次第である。    平成二年(1990年)七月吉日      川島町 春秋会

 

 碑石の文章の中に、「侍女として随伴来日した婦人」という箇所がある。正直これは不適切な表現だとは思うが、この朝鮮人女性の境遇に目に留めて慰霊してくれた日本人達がいたという事実の方に目を向けたいと思う。

 

 秀吉の朝鮮出兵の事実は多くの日本人が知っている。それに対し「非常に残虐で悪いことをした」という認識を持つ日本人は多い。耳塚、鼻塚の話は日本でも良く知られている。しかし自分の居住する地域からの朝鮮出兵があったということを、実感として感じている日本人は多くない。そしてその時数万人の朝鮮人が連れてこられたことも、一部の研究者には自明のことだったかも知れないが、一般に広く知られたことではない。私自身、韓国に嫁いで10年以上経過していながらも、わが家の先祖が朝鮮から人を連れて帰っていたことも知らずにいたのだ。朝鮮征伐に関して詳しく調べる度に、関連した人間の多さと戦いの規模に驚くばかりだ。

 

今年2012年は1592年から420年、数えて7回目の壬辰年である。「歴史は繰り返す」ではなく、「歴史に学ぶ」ための壬辰年になることを願う。そして願いを空言にしないため「徳島の大名蜂須賀家政が踏んだ韓国の地・全羅道」に関するレポートをまとめて故郷の新聞に掲載依頼を打診するつもりだ。それが私にとっての連行された朝鮮人の方々に対するささやかなささやかな慰霊である。

나카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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