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에 있어서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인물이 바로 녹두장군 전봉준이다. 전봉준은 근대사회로 접어드는 조선후기 불평등한 봉건사회와 나라의 주권을 강탈하는 외세에 저항적이었던 대표적인 인물로, 당시 민란수준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혁명으로 확산되었던 동학농민전쟁의 최고 지도자였다. 특히 이후 식민지배와 분단, 독재정권으로 이어지는 근현대사에서 끊임없이 전개되었던 민중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이렇게 억압받던 민중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되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이 올해로 탄신 154주년을 맞았다. 이에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가난과 유랑생활 속에 밝게 자란 녹두-
한때는 반란의 주모자로, 이후에는 민중의 우상으로 숭배되며 우리의 뇌리에 오랫동안 혁명의 아이콘으로 자리해온 전봉준은 고창읍 중림리 당촌에서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명숙(明叔)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또래 아이들에 비해 유난히 키가 작았지만, 주먹이 크고 체구가 단단했으며, 담력이 크고 총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훗날 어릴 적 ‘녹두’라는 별명 때문에 ‘녹두장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봉준의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에 10대 초반부터 살길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 전창혁을 따라 전주, 태인, 고부 등으로 옮겨 다니며 30대 중반까지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아버지 전창혁은 가족을 이끌고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어려운 집안의 생계를 위해 정착하던 마을에서 자그마한 서당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전봉준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전봉준은 가난한 삶속에서도 글을 통해 학식을 높여 갔으며, 뜻있는 동지들과 어울리면서 농민전쟁의 핵심인물들이었던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과 같은 의기 있는 사람들과 교분을 쌓아갔다.
-봉건제도와 폭정에 맞서다-
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무렵인 1890년대는 삼정문란과 농민에 대한 봉건 수탈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제에 의해 조선의 문호가 강제로 개항된 시기였다. 이후 일본을 비롯한 주변의 열강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조선에 불평등 무역구조를 확대시켜 나갔다. 권력의 상층부에 있던 부패한 관리들은 벼슬을 팔아 뇌물을 챙기고 갖가지 이권에 개입하면서 재물을 모아 갔으며, 하부관리들 조차 백성들을 수탈하며 자신들의 배만 채워갔다. 당시 전봉준이 살던 고부는 관할지역이 넓고 농업소득이 풍부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벼슬아치들이 수령 자리로 탐을 냈던 곳이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은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일삼았으며,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수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해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만 갔다. 이에 농민 대표로 나선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과 김도삼, 정일서 등은 고부군수의 학정에 항거하며 민소(民訴)를 제기하다가 구속되었으며, 전창혁은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장독(杖毒)으로 사망해 고부를 활활 타오르게 한 불씨가 되었다. 이 때문에 조병갑은 잠시 다른 곳으로 전임발령을 받았지만, 권세가의 힘으로 다시 고부로 부임해 탐학을 일삼아 농민항쟁에 명분을 주었다.
-고부농민항쟁-
1894년에 일어났던 고부농민항쟁의 중심엔 전봉준이 있었다. 전봉준은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했으며, 농민들의 원성이 컸던 만석보를 허물었다. 고부농민항쟁은 그동안 있어왔던 소요성 농민항쟁과는 달리 목표를 달성한 이후에도 계속 무장을 유지하면서 감영병의 파견에 대비해 사방의 출입을 막고 길목의 요소를 장악하고 체계적으로 감영병의 파견에 맞서며 해방구를 유지해 나갔다. 이후 조정에서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신임군수 박원명,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 잘못을 시정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농민군은 해산했다.
-동학농민전쟁의 시작 무장기포-
농민군 해산 이후 처음 약속과 달리 안핵사 이용태는 무자비하게 농민군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전라도 일대의 농민들과 동학 신도들이 크게 분개했다. 이때 전봉준은 새로운 국면 전환을 위해 3월 20일경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당시 무장현 공음 구수내에서 기포를 알리며 재봉기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제1차 동학농민전쟁의 시작이었다. 전봉준은 사람을 죽이지 말 것, 충효를 다해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 서양 세력과 일본을 몰아내 나라의 정치를 깨끗이 할 것, 서울로 진격하여 그릇된 정치가를 몰아낼 것 등을 주장하며 혁명을 일으켰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북도 정읍 부근의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부안, 정읍,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뒤 4월 27일에는 전주에 입성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이 들어오게 됨으로써 갑자기 조선이 국제분쟁의 무대가 될 소지가 커지자 조정과 농민군은 화전(和戰)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협상을 하면서 자신들이 점령했던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집강소는 농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고을을 다스리는 자치 기구였다. 전봉준은 정부로부터 부패한 관리의 처벌, 노비 해방 등 농민을 위한 12개 항목을 약속 받아낸 뒤 휴전했다. 이 폐정개혁안은 보편적이고도 제도적인 차원에서 정치권력의 문제를 제기했으며 봉건 말기적 현상을 시정하려는 반봉건의식, 외국상인의 침투로 말미암은 폐해를 시정하려는 반외세·반침략 의식을 뚜렷하게 나타냈다.
-피지 못한 꿈-
그러나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점점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자 전봉준은 1894년 8월에 다시 제2차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전봉준은 남도 접주가 되어 12만 농민군을 이끌고, 북도 접주 손병희의 10만 농민군과 함께 연합전선을 펼치며 일본군에 맞섰다. 항쟁의 규모는 점점 커져 중부, 남부 전지역과 평안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신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동학군은 공주와 금구 등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순창으로 피신한 전봉준은 피노리에서 옛 부하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로 끌려와 1895년 동지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다시 피어난 녹두꽃-
전봉준은 비록 혁명에 실패해 반란 주모자의 오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15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 역사와 민중들의 가슴속에 평등한 세상을 위해 굴하지 않았던 영원한 민중의 영웅으로 남아있다. 그가 부상을 입고 가마에 실려 압송되어가는 사진속에서 비록 끌려가는 입장이지만 당당함을 잃지 않고 날카로운 눈매로 세상을 직시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그가 꿈꿨던 이상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전봉준의 생전의 모습이 담긴 이 한 장의 사진은 이후 우리나라 저항문화의 상징이 되어왔다.
안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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