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명의 농활대(농촌활동)가 고창을 다녀갔다. 이번 농활대는 아산면 월성마을·용계마을·반암마을과 고수면 인동마을, 흥덕면 서구마을, 신림면 무림마을, 상하면 송라마을·신자룡마을·생장마을 무장면 도산마을에 각각 14명씩 10개 팀으로 나뉘어 마을에서 7박 8일간 생활했다고 한다. 무림여성노인회관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 근처에 위치한 대강마을회관에서 생활했다는 농활대를 찾아가 보았다.
농활대를 찾은 7월 1일(목)은 오후 마을회관에서 있을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을 분들을 위한 공연준비와 대접할 음식 장만을 하겠다고 오전 일을 마치고 들어온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번이 3번째 농활이라는 송송이(우석대3년) 무림 마을대장은 “농활은 학생들에게 열심히 일하지만 나아지지 않는 농촌생활의 현실을 생각해 볼 기회가 되고, 농민들은 학생들이 등록금 문제 등으로 목소리를 높일 때 함께 해 줄 수 있는, 서로 공동체의식을 키우는 과정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마을에 가가호호 방문해서 사진도 찍고, 마을이야기도 듣고 안마도 해드리면서 마을 곳곳을 돌아봤어요”라며 “마을분들이 찾아온 저희를 반갑게 맞아주신 것도 그렇고, 말벗이 되어 농촌·삶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좋은 기억이다”고 말했다.
박진호(우석대1년) 학생은 “집에서도 안 해 본 일인데, 같이하면서 단체활동도 배웠다”며 7박 8일의 일정이 너무 즐거웠다고 한다. 박진호 학생의 기억에 남은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들 혼자 계신 분들이 많더라”는 것이다. 올해 처음 농활에 참여했다는 박 군은 ‘아침 기상’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낮에는 일손 돕고, 저녁이면 가가호호 방문하고 돌아와 하루를 점검하는 시간을 가진 후 늦게 잠이 들기 때문이다.
농활에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복학생들도 만났다. 나현수(우석대3년) 학생은 복학생이긴 하지만, 농활은 처음이라고 한다. “농활이 농민과 학생이 연대해, 농민문제와 학생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응원해 줄 수 있는 자리임을 되새기는 자리였다”고 전했다.
또, “분반활동을 통해 할머니를 통해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는 못 받았으니까, 너희는 부모님께 잘해라’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나 군은 “6시 되면 돌아와야 하는데 다들 일손을 놓지 않는 모습에 일을 더 해야할 것 같아 그게 힘들고 미안했다”며 “그런데도 두어 시간 일하면 일 끝났으니 가라며 경험 없는 학생들을 배려했다”고 말했다. 우리네 농심(農心)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다.
복학생 김세호(우석대, 06학번) 군은 “농촌에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계시다는 이야기만 들어왔었다”며, “와서 보니, 정말 그렇더라. 더구나 연세 드신 분들이 꾸준히 힘든 일을 해 오고 있다는게 가장 와닿는다”며 “농활은 고생만 하는 것이 아니다. 농촌의 모습을 통해 앞으로 힘겨운 시간을 이겨낼 어떤 힘을 배워갔으면 좋겠다”고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처음 농활에 참여했다는 학생들은 “힘든만큼 벌어간다고 들어왔고, 농촌에 와보니 경운기는 물론 트랙터나 이앙기 등을 보면서 농가부채에 의문을 가졌었다”며 “이야기를 듣고 체험하지 않았으면 모를 일이었다”고 한다.
이날 저녁, 학생들은 마을분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기 위해 부침개 등 음식을 준비하고 풍물과 판소리 등 공연준비에 한창이었다. 학생들의 공연 모습을 보고 유태영 이장은 “학생들이 가고 나면 한 일주일은 씁쓸할 듯 싶다”며 “마을일도 도와줬고, 일주일간 마을분들을 찾아가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고 기억했다.
다음날인 2일(금) 오전 전체 해단식을 위해 마을을 떠나는 학생들에게 꼭 밥 한 끼 지어주겠다며 잡는 마을들 때문에 늦는 팀들도 있었고, 학생들은 ‘일주일간 좋은 추억 만들고, 잘 배우고 간다’며 돌아갔다. 일주일은 씁쓸할 것 같다는 이야기에 다시 농활대가 쉬어간 대강마을을 찾았다. 10가구도 안되는 마을에 일할 수 있는 분들은 논밭으로 나가 마을은 한적했다.
대강마을 회관 바로 옆에 자리한 이귀님 할머니 댁을 찾았다. 학생들이 생활하는데 화장실도 부족해 여러 가지로 불편할 것을 감안해 집화장실을 이용하라고 한 것도, 마을회관 앞에 천막을 쳐서 씻을 공간을 마련한 것도 이 할머니의 배려라고 한다. “5남매도 키웠고, 애들 왔다 가면 마을 어귀 안 보일 때까지 보고 있지. 남의 집 애들인데…”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말씀이 손자·손녀 같아서 그렇게 보고 계셨다는 말처럼 들린다.
다시 마을회관 앞으로 와서 나순례 할머니를 만났다. 외손자를 데리고 나온 할머니는 “마을에 사람도 별로 없고, 낮에는 일하러 가서 적적하다”고 한다. 그저 학생들에 대해서는 “지나다니면 인사도 꼬박꼬박 하고, 순하게 잘 하더라”는 말 뿐이다.
마실을 나선 나순례 씨를 따라 윤정례 할머니 댁으로 갔다. 윤 할머니는 “학생들 가고나니 적적하다”는 역시나 같은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날마다 찾아와서 인사한다고 하고, 사진도 찍자고 하더라”며 “늙은이 찍어서 뭐하게라고 했는데 찍고 보니 좋더라”고 한다. “매번 올때마다 오지 말라고만 했는데, 가니 아쉽다”고 한다.
농활대 학생들로 북적거리던 마을은 허전함이 채워지고 있었다. 학생들의 빈자리에 마을분들은 또 한 번 허전함을 채운다. 하지만, 마을분들이 아쉬움이 큰 만큼 공감대를 형성하며 시간을 보낸 농활대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7월 중순 다시 한 번 농활대가 고창을 찾는다고 한다. 이번 농활과는 다른 팀들이 오겠지만, 또 한 번 서로에게 좋은 추억들을 남기는 시간이 되길 기대해본다.
유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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