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면 제하리로 봉사를 목적으로 이사 오신 김유자 님, 오숙경 님을 만났습니다. 독거노인과 다문화가정 돌봄을 주로 하시는데 이 분들의 아담한 공간이 ‘다솜의 집’입니다. 이 꼭지에선 주로 귀농, 귀촌인들을 만나고 있는데요, 이분들은 사람농사를 짓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에 자리를 잡으신 계기는? 우리는 천주교의 한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고요, 원래는 양로원에서 활동하다가 집에 계신 노인 분들께 봉사활동을 하려고 전라북도에서 노인복지시설이 부족한 지역을 찾았었죠.
‘다솜의 집’ 운영은 어떻게 하고 계시나요? 오: 천주교 교구에서 지원도 받고 우리 둘이 일해서 돈도 벌고요, 적지만 이곳저곳에서 후원도 받으며 활동하고 있어요. 김 선생은 노인봉사를 주로 하고 저는 다문화가정과 아이들 돌보는 일로 역할을 나눠서 하고 있어요. 하지만 딱히 구분 지을 수도 없는 게 노인봉사로 시작은 했지만 방문해보면 도와야 할 아이들이 있었고 이주민 여성들을 만났어요. 농촌의 문제가 어르신만은 아니고 어찌 보면 지역 안에서 다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김: 다문화, 독거노인 이런 일을 한다기 보다는 살고 있는 마을 안에서 사람들이 모범적으로 잘 해야지요. 공동체로서 서로 이해하고 좋은 관계를 형성해서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자: 네. 마을 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김: 우리도 마을 울력 다 참석하고요, 잔치나 장례 있으면 다 참석해야지요. 그래서 조의금이 만만치 않아요(웃음).
다문화가정 분들의 어려움은 어떤 점들이 있나요? 오: 여기 와서 돈을 벌어 모국에 도움을 주려던 생각과 차이가 나는 것이죠. 가족이 농사를 지으면 소득을 구분지어 나눠주는 게 아니잖아요. 음식도 어려운데 특히 임신 했을 때는 더 힘들어하죠. 또 교통수단이 부족하니 이동하는데도 불편하고 남성위주의 한국문화도 이분들에겐 낯설죠. 아이들 언어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어요.
기자: 프랑스인과 결혼한 친구가 있는데 아이들이 한국어와 불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어요. 그런데 동남아 이주여성들은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지 못한다고 들었어요. 엄마가 아이들과 모국어로 대화를 못하고 서툰 한국말로만 키운다면 엄마와의 관계가 아주 힘들어지잖아요. 미국이나 유럽인들의 언어라면 반대하지 않겠죠?
노인분들 돌보시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나요? 김: 뭐 돈이 있어도 쓰지 못하는 거죠. 돈 아끼느라고 쓰질 못하세요. 자식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장남이 못 살면 기운 없어하시죠. 떨어진 곳에 사시는 분들은 전화도 못 걸어서 오는 전화만 받아요. 정신이 온전치 못하신 분들은 꼼꼼히 챙겨 드려야하는데 행정력이 그렇게 까진 안 되죠. 그래도 요즘엔 지원이 잘 되 있어서 연결만 잘 해드려도 큰 어려움은 없는 것 같아요.
고창에서 이런 봉사를 하시는 곳이 있나요? 이주민지원센타가 있고요. 그 곳은 이주여성들을 모아서 하는 입장이고 ‘다솜의집’은 지역 안에서 정착하는 것을 지향하거든요. 성격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기자: 서로 보완적인 관계일 수는 있겠는데요.
오: 이런 작은 작은 활동들이 지역 곳곳에서 벌어지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솜의 집은 어떻게 변화되어 갈까요? 오: 계속 소규모로 지역과 밀착돼서 갈 거구요, 아이들에게 좀 더 집중해서 갈 건데요. 가르친다는 것이 전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잖아요. 방학 때 공부방을 하더라도. 이런 인적인 네트워크가 부족한 것이 어렵죠.
끝으로 희망을 말씀해 주세요. 오: 기쁘게 사는 거죠. 이 분들의 공동체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이분들이 많이 배워서 도움만 받는 것이 아닌 지역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내고 능력을 나누고 또 이 분들이 다른 이주여성들의 멘토가 되어주는. 이렇게 확장되어갔으면 좋겠어요.
김: 다 노인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노인들을 더 이해해주고 치매 걸리신 분들은 더 도와서 서로 돕는 세상이 돼야하지 않나싶어요.
신앙을 입으로만 달고 사는 것 보다 실천해 나가는 두 분들 덕분에 고창의 온도가 조금은 더 따듯해지는 것 같습니다. 고창에서 면마다 작게라도 이렇게 활동하시는 분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고창이 될까요?
김동환 시민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