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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 김경식 연정교육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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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교육기관 서당…삼국시대 이래, 조선조에서 발전 조선시대 서당은 비록 초등정도의 교육기관이었으나, 국민 대중의 문자교육과 향촌의 도덕적 향풍(鄕風)을 수립· 순화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오늘 날에도 경향 각지에서 또는 방학을 통한 여가가 있으면 ‘서당’이라는 이름으로 한문 강좌 등을 개설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당이 언제부터 존재해 왔는가에 대한 교육사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고려 중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서당이 초등 정도의 교육기관이라 한다면 그 명칭 여하를 떠나서 그 설립의 상한선은 고구려의 고등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의 설립을 생각할 때, 적어도 우리나라에 문자교육의 시작과 그 궤를 같이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서당은 실질적, 현실적으로 삼국시대 이래로 있어왔으며, 이는 특히 조선조에서 발전했다.
다양한 서당설립유형…훈장, 유지(有志), 동리(洞里), 관(官) 그러나 학규(學規)상 서당이란 명칭이 처음 보인 것은, 서기 1659년(효종 10년)에 송준길(宋浚吉)에게 명하여 ‘서당학규’를 제정하게 된 데에서 부터이다. 이것이 이른바 ‘향학지규(鄕學之規’이다. 여기에 의하면 “지방의 향촌이 각각 서당을 세우고 훈장을 정하여 그 효과가 없지 않았다. 수령은 때때로 친히 가서 그 학도를 고강(考講)하고, 감사와 교양관(敎養官)도 또한 고강할 것이다. 그래서 성적이 유난히 드러나는 자가 있으면, 대전(大典)에 의하여 그 사장(師長)에게 호역(戶役)을 감하고, 그 학도에게는 상을 주며, 그 중에서도 드러나는 자는 계문(啓聞)하여 사장으로 승진시켜 동몽교관으로 삼거나, 다른 관직을 주어 권장하는 뜻을 보여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이 향학지규는 서당을 장려하는 안을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서당의 설립은 기본재산이나 인가를 요하는 것이 아니므로, 누구든지 뜻이 있는 사람이면 훈장 한 사람과 방 한 칸으로써 마음대로 설립할 수 있었다. 서당 설립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1)훈장자영서당(訓長自營書堂) : 이는 훈장 자신이 자기의 생계 혹은 교육취미로 서당을 설립하는 경우이다. 2)유지독영서당(有志獨營書堂) : 이는 마을에 가세가 넉넉한 이가 자기 집의 자제 및 그 친척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훈장의 급여를 단독으로 부담하고 세운 서당이나 때로는 이웃의 자제들에게도 무료로 수업케 했다. 이 혜택이 다름 아닌 ‘동냥공부’이다. 3)유지학계서당(有志學契書堂) : 몇몇의 개인이 계를 형성하여 훈장을 초빙하고 계원의 자제를 교육하는 서당. 물론 훈장의 의식주 및 경비는 계원이 부담하였다. 4) 동리학계서당(洞里學契書堂) : 동네 전체가 계를 형성하여 훈장을 두고 교육하는 서당이다. 5) 관서당(官書堂) : 관청이 주도하여 설립, 경영하는 서당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 현재 교육사학계에서는 서당유형을 1)에서 4)까지만 거론하고 있으며 그것도 필자가 유독 주장하는 ‘계서당’을 ‘조합(組合)서당’으로 설명하고 있다. ‘조합서당’이라는 용어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사용하던 것을, 우리 학계에서는 그동안 반성없이 그대로 사용해 오고 있다.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학계’는 조선조에 많은 역할을 수행하면서 발전해 왔던 계(契)의 일종으로, 여러 계첩(契帖)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교육사학계에서 ‘관서당’을 거론하는 학자는 필자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순우 교수뿐이다. 우리 고을 흥덕에도 옛날 ‘관서당’이 있었다. 이런 연유로 서당의 성격에 대하여 교육사학계에서는, 서당은 모두 사학(私學)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필자는 ‘원칙적으로 사학’이라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서당은 훈장, 접장, 학도로 구성 서당의 설립목적은 인륜을 밝히며(明人倫), 향촌사회에 있어서 상하의 분별과 예법 및 초보적 유학의 전파에 있었다. 그러므로 서당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중등교육기관인 사학(四學)과 향교에의 입학을 위한 준비교육기관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지방의 청소년들에게 한문의 독해력을 이해시키고, 유교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과 예법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는 역할을 하였다.
서당의 조직은 훈장(訓長), 접장(接長), 학도(學徒)로 이루어 졌다. 훈장의 학식 표준은 일정하지 않았다. 강독에서는 경사(經史), 백가(百家)를 통하는 실력 있는 자는 드물었으며, 대체적으로 그 지식수준이 낮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접장은 학도 중의 나이가 든 자중 학력이 우수하고 품행이 독실한 자를 골라 접(接, 단체를 뜻함)의 장으로 하고, 그로 하여금 훈장을 대리하여 주로 초보자인 어린 학도를 가르치게 하는 자를 지칭하였다. 따라서 접장은 학도를 대표하며 한편으로는 학습지도면에서는 훈장을 보조하기도 하였다. 훈장은 접장을 대리하여 가르치기는 하였으나 평가만은 훈장이 하였다. 학도는 보통 7~8세로부터 15~6세 아동이 중심이 되었으나 나이의 상한선도 하한선도 없었다.
교육내용은 강습, 제술, 습자 서당의 교육내용은 강습(講習), 제술(製述, 시나 글을 지음), 습자(習字) 세부분이었다. 강독은 처음에 천자문(千字文)으로 시작하여 동몽선습(童蒙先習), 사자소학(四字小學), 소학, 4서 3경 등으로 그 수준을 높혀갔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적인 것으로 지켜지는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교육방법에 있어서는 강독은 매일 자기의 능력에 맞게 범위를 정하여 배우고 반복 학습하는 것이었다. 하루 배운 것은 다음 날 배송(背誦)하여 통하고 나면 다음 것을 배워 나갔다.
그러나 서당교육은 오늘날 학교교실에서처럼 일률적으로 학습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학습자의 개인차와 그 능력에 맞게 범위를 정하여 놓고, 주로 개인적인 지도방법에 의하여 교수도 진행된 셈이다. 따라서 서당에 똑 같이 입학했어도 그 능력에 따라 교육내용도 다르고 그 진도도 달랐다. 결국 현대적인 교육용어를 빌면, 벌써 ‘무학년 교육제도’를 운용한 셈이고 개인차 능력별 수업, 반복학습을 한 셈이다.
서당에서 체벌, 놀이, 책걸이 학습 내지 훈육지도에 있어서는 관용과 벌을 적당히 조절하여 심정을 잘 살펴 지도하였다. 벌에 있어서는 체벌(體罰, 회초리)이었다. 그러나 체벌은 최근 문제시 되고 있는 사실상 학교에서의 폭력과 같은 체벌은 아니었다. 서당에서의 체벌은 학생이 잘 못 했을 때에는 자기가 맞을 회초리를 만들어 오게 하여, 그 회초리로 벌하였다. 이 때 학도는 회초리를 만들어 오면서 자기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는 시간을 갖고, 훈장은 훈장대로 감정을 풀게 된다. 따라서 학도가 벌을 받을 때에는 학도의 반성과 훈장의 이성적 지도가 교차되었으니, 회초리의 행사는 학도에게 각성을 주는 교육적 의미가 있었다 할 것이다.
서당에서는 여가 시간에 놀이도 하였다. 예를 들면 쌍육(雙六)놀이를 하였다. 이 놀이는 고창지방에서 고창읍 도산리, 아산면 상갑리, 반암리, 성내면의 구술 등지에서 정월에 많이 하기도 하였다. 또 옛사람의 시를 암송시키는 ‘초(初)·중(中)·종(終)’ 놀이, 우리나라의 8도 군(郡) 이름을 기억시키는 ‘고을 모둠놀이’ 등이 그 중요한 놀이였다. 그리고 자기가 배운 책의 학습이 끝났을 때는 ‘책걸이’라 하여 보통은 자기 집에서 떡을 해와 나누어 먹었다.
서당은 근대적 학제가 시행된 후에도 보통교육 내지 국민교육기관으로 계속 유지되어 왔다. 요즈음 글로벌화 시대에 보듯, 국제 언어화 되다시피 한 ‘영어교육’에 학교나 학원에서 매달리고 있는 것과 같이, 조선조에서는 당시 국제 언어였던 ‘한문교육’은 초보적으로 서당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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