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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 김경식 연정교육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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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초파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이날은 불자들에게만 의미 있는 날은 아니다. 필자는 불자도 아니요, 요즘 유림이라고 자기 착각에 빠진 사람도 아니며, 기독교도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부처·공자·기독 모두 인류 스승이기에, 그 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있을 뿐이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류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순히 위대한 성인 한분이 탄생하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오심은 그대로 우리들에게 ‘참[佛知見]’을 몸소 열어보이심[開示]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오심’을 계기[因緣]로 하여 우리 스스로가 ‘참’을 깨닫고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부처님의 ‘오심’을, 인격적 ‘만남’으로 영원한 생명으로서 부처님[佛]은 본래 그대로이니, 오고 가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부처님인 싯다르타[悉達多]는 2,500여년전 어느 해 음력 사월 초파일,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하여 불가에서는 그날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봉축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월 초파일 절에 가서 이름 석자 적어 놓고 등을 밝히며 자손의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것 보다, 부처님의 그 ‘오심’이 진정한 의미에서 ‘나’에게로 ‘오심’이 되려면, ‘부처님’과 ‘나’와의 인격적 ‘만남’이 있어야 한다. 그 ‘만남’을 통해서 ‘나’를 분명하게 자각함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람됨’이 이루어져야 한다. ‘만남’을 통한 ‘사람됨’이 없을 때 부처님은 결코 ‘나’에게 오심이 없다. 따라서 ‘부처님 오신 날’인 사월 초파일만이 아니라 언제나 ‘부처님 오신 날’이 되도록 교육적 계기, 즉 사람됨의 계기를 마련하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만남’은 무엇일까. 우리들은 아침 산책길에서 동네 사람들을 스치며, 거리를 지나다 무수한 사람들과도 만난다. 모양성에서 연인과도 만나고, 약속다방에서 친구들과 만나고, 시장에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이들은 공간적인 만남이요, 접촉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거의 일상적인 사회관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동창회라던가 어떤 모임에 참가하면 오랜만에 만나 악수도 하고, 흥이 나면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교적인 수준의 인간관계에서 서로 즐기는 정도에 그친다. 필자와 같이 학문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어떤 문제의식 속에서 고심하고 책을 넘기며 탐독하고 여러 가지 사색을 하게 되지만, 대부분의 독서는 그저 직업적인 일과의 경우가 허다하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일생 살아가노라면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모두 일상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상적인 접촉 속에서는 결정적인 인생의 전환도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도 나타나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실존적 자각’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습관적인 매일 매일의 무심코 지나가는 생활 속에서 참다운 자기는 매몰되어 가는 것이다.
‘만남’이 인생 재창조와 전환의 계기 신라 진덕여왕 때 34세인 원효(元曉)스님은 당나라 유학을 위해 길을 떠나가다, 어느 날 밤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문득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오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없다’고 크게 깨달아 유학의 길을 포기하고, 그 뒤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민중불교를 신라의 종교로 개척하는 데 진력하게 되었다. 고려 의종 때 보조국사 지눌(知訥)스님은 〈육조단경(六祖壇經)〉과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 및 대혜(大慧)스님의 어록(語錄) 속에서 깨달음의 눈을 뜨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남강 이승훈(李昇薰)은 도산 안창호의 평양 모란봉 밑 강연회에서 민족혼에 호소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감동되어 나라에 대해 깊이 깨닫고, 각오하는 뜻에서 즉시 머리를 깎고 술을 끊으며 향리로 돌아와 민족교육사업과 독립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은 그 어떤 것과의 ‘만남’을 계기로 하여 정신적으로 크게 눈을 떠, 인생의 전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 ‘어떤 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자연적 사물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사소한 사건이나 책 속의 말씀일 수도 있다. 이 ‘만남’이야말로 인생을 스스로 재창조하는 계기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시 탄생시키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만남’이라는 일종의 유행어가 되다시피한 때도 일찍이 없는 것 같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만남, 그 어떤 것과 마주쳐도 만남이라고 한다. 사람은 사회 속의 사람이므로 일평생 무수한 사람과 직·간접으로 만나기 일수다. 인생살이 자체가 사회와 자연, 문화의 여러 환경 속에서 영위되고, 무수하고도 복잡다난한 여러 환경과 접촉하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러한 접촉들을 만남이라고 한다면 인생 자체가 만남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살이는 만남의 홍수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일상적인 접촉이라는 만남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만남이 아니다.
교육학이나 철학에서 ‘만남’이라고 할 때 그 ‘만남’은 의미있고 독특한 만남이다. 그 ‘만남’은 단순히 공간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만남’은 어떤 의미의 만남일까. 자신의 인격적 독자성을 가지고 그 무엇과 마주하여 대결함으로써, 그 무엇의 내면적 본질이 자신의 내면에 침투되어 나 자신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계기를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만남’일 것이다. 이 ‘만남’은 어느 계기에 순간적으로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에게는 한 순간에 인격적 비약이 오게 되며 가치관의 180도 전환이 온다. 그리하여 인격적 혁명이 이루어짐으로써 지금까지의 나는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이 되는 것 즉, 교육은 ‘만남’을 계기로 하는 것이다.
교육은 ‘만남’을 계기로 학교의 경우, ‘선생님은 많지만 스승은 없다’는 오늘날 교육계의 씁쓸한 유행어는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진정한 ‘만남’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남’은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기보다, 스스로 간절한 문제의식과 탐구정신이 있는 사람에게만 어느 순간엔가 홀연히 오는 것이다. 이런 간절하고도 진지한 정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접촉과 부닥침이 있어도 ‘만남’은 오지 않는다. 교육적 ‘만남’을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 모두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 교사가 참다운 스승으로 학생과 만나가기 위해서는, 교사 자신도 무언가 인격의 감화를 줄 수 있는 부단한 노력과 행동이 있어야한다. 교사가 어떤 운동을 위해서 학생을 볼모로 잡는다든지, 학생을 편식시켜서도 안 된다. 교육현장에서 창의력을 기른다 해서 그 방면에만 힘을 기우려서도 안 된다. 커가는 학생에게는 창의력도 중요하지만 지식도 그 만큼 중요하다. 학생들이 지식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자주적으로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교육적 ‘만남’의 환경을 조성해 주지 못하는 가장 큰 문제는, 교사가 집단적으로 교사 본연의 한계를 넘어 큰 소리를 내는 것도 있지만, 일부 지방교육수장 처럼 자의적으로 교사와 학생의 교육적 ‘만남’이라는 환경을 의도적으로 형성하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생을 보호한답시고 예컨대 인권조례를 만들었다. 이것은 극소수의 교사답지 못한 교사의 행동에서 학생을 방어한다는 의미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졸속한 처사다. 원래 인권은 교사나 학생이나 다 같이 누리는 천부적인 권리며, 그 권리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침해받지 않는다는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다. 그러나 일부 지방교육수장들이 인권마저 기본적으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 범위를 학생 대 교사관계까지로 확대, 잘못 인식하고 있다. 결국 교사를 학생과의 대립적인 상황으로 몰고가고 있으니 그러한 상황하에서 교사와 학생이 어떻게 진정한 ‘만남’을 형성할 수 있을까.
교사와 학생은 대등한 관계라 하지만 그것은 인격의 대등이라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경험은 평생 동안 형성되어 가는 것이지만, 교사는 선경험자요 학생은 경험을 형성해가고 있는 미경험자이다. 따라서 교사는 법규 이전에 학생의 경험을 유도해야할 위치에 있다는 것은 교육의 본질적 기능의 하나인 문화의 전승이라는 면에서도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교육적 ‘만남’에서 사람됨의 계기가 형성된다고 한다면 오늘날 한국교육의 문제와 과제는 ‘만남’의 장을 바람직하게 형성해 주는데 있다 할 것이며, 그 보다도 급선무는 만남의 대상인 교사의 행동반경을 위축시켜서는 안 되고, 교사도 교사 본연의 자세를 떠나 속세적인 정치적 물살에 휩싸여 흘러가는 것도 안될 것이다.
부처님이 오신 날, 하루만을 봉축행사로 끝낼 일이 아니다. 우리 마음속에 항상 부처님이 오시기를 바라며, 우리 교육계는 다 같이 반성하여 자라나는 청소년·학생들이 진정으로 교육적 ‘만남’을 계기로 일상적인 나가 진정한 ‘나’가 되고, 역사와 사회를 올바로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갖춘 참사람이 되기에 다 같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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