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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육(7) 옛날의 어머니상~ 한국인의 교육 풍속 16
연정 기자 / 입력 : 2011년 07월 11일(월) 16:25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연정 김경식
연정교육문화연구소장

어머니의 모습은 돌아가시고 나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사무친다. 끝없는 자애와 헌신으로 자녀를 위하여 일생을 보내신 어머니의 모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러 작품에도 나타났지만, 우리들 어머니의 가슴은 한없이 부드럽기만 하다. 어머니는 새 생명을 탄생시킨 점에서 모든 사물의 시원을 상징하며, 자녀를 위하여 언제나 헌신하고 자애로움을 베푸신 점에서 인간관계의 너그럽고 인자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누구나 어머니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필자 역시 그러하다. 그러기에 “어머니”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정감이 있는 말이다. 오늘의 어머니보다 옛날의 어머니들은 학력이라면 초등학교 입학도 졸업의 사실도 없는 것이 전부이겠지만 닭이 알을 품듯이 천성적인 사랑으로 자녀들을 감싸주었다.
옛날 어머니의 경우를 몇몇 분 들어보기로 한다.

퇴계 이황의 어머니 박씨와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씨는 현숙함에 있어 뛰어났다. 퇴계는 어머니 박씨에 대하여 “돌아가신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박씨는 타고난 소질이 아름다웠는데, 아버지의 후처가 되셨다. (…) 여러 아들들이 차차 커지자 원근의 학교에 보냈으며, 항상 훈계를 하시어, 몸가짐에 조심하고 행실을 근엄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셨는데, 이것은 문예에 의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셨다. 기회 있을 때마다 이것을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정성되고 경계한 바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과부 자식은 배우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니, 너희들도 백배 노력하지 않으면 이 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다”고 회상하고 있다.

특히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모든 희노애락을 참으며, 한가정의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시집가지 전에는 부모에게 극진한 효성을 다함으로서 자식된 도리를 했고, 출가한 뒤로는 시어머니와 남편을 받들고 도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편의 부족한 점을 권고하고 선도하기까지 하여 사회에 출세까지 시켰다. 그리고 율곡 형제들을 가르치느라고 일년동안 놀이 한번 간 일이 없었다는 일화를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자녀들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구나, 정말 어디에 내 놓아도 부끄러움이 없겠구나 하고 느꼈을 때였다. 그리고는 그 자녀들에게 경애, 입지(立志), 성실, 극기, 신의, 지조, 수분(守分)등 정신적 가치의 다리를 놓았다.

물론 신사임당은 이러한 정신적 가치를 그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생활을 통해 체질화시켰던 것이다. 물질주의적 위협 때문에 가정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는 이 때, 오늘날의 어버이들이 어버이된 자신을 되찾으려는 성실한 노력이 있어야 함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러기에 오늘날에도 신사임당의 교훈과 어머니상은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정숙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은 지금까지도 부녀 중의 으뜸이라 전해지고 있다. 진실로 신사임당의 성품과 행실은 현숙하고 인자한 분이었다. 그리고 가정생활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자녀들이 보다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생활태도를 갖도록 유도하는 교사로서의 역할까지 했다. 그러므로 신사임당의 빛나는 교육정인을 굳어버린 <미이라> 같이 대해서는 아니 되겠다.

또 이준경(1499~1572)의 어머니 신(申)씨는 남편이 죽은 후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서 소학·효경·대학 등을 친히 가르쳐, 그로 하여금 후일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했다. 선조 때의 명재상이었던 이항복(1566 ~1628)도 과부 어머니의 엄격한 훈계 속에서 자랐던 것이다.

한석봉(1543~1605)의 어머니도 과부로서 떡장수를 하면서도 아들의 글씨 공부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 어머니의 교훈과 정성과 사랑은 오늘날 까지도 칭송되어 오고 있다.

숙종 때 김만중(1637~1692)의 어머니 윤씨도 역시 현모였다. “윤씨는 어렸을 때, 의복과 음식을 사치스럽게 하지 않으며, 장차 가난한 선비의 아내가 돼서는 어찌 늘 이같이 하리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정경부인 윤씨 행장의 한 구절이다. 윤씨의 부군(김익겸)은 정축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국하였으니, 그 뒤 살림은 말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섯 살 난 큰 아들 만기(萬基)와 유복자 만중을 앞에 놓고 실로 앞날이 암담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손수 수놓고 베틀로 옷감을 짜면서도 살림의 어려움을 어린 자식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이들이 공부에 힘을 기울이지 않고, 행여나 살림에 마음을 쓸까봐 늘 조심했다. 윤씨는 자식들이 잘못이 있으면 회초리로 때리면서 울었다. 그리고 “너의 아버지가 형제를 나에게 맡기고 돌아가셨는데, 너희들이 이렇게 공부를 안 하면 무슨 면목으로 저승에서 너의 아버지를 뵙겠느냐? 글 못하고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자식들을 훈계하였다.

어머니 윤씨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식을 위한 책이 있으면 값의 고하를 묻지 않고 사주었으며, <소학> <사략> <당률(唐律)> 같은 책은 손수 가르쳤다. 그래서 김만중은 후일 어머니 윤씨의 파한(破閑)을 위해 <구운몽>을 쓰게 되었다.

김만중, 김만기를 길러낸 윤씨의 친정할머니 정혜옹주 역시 훌륭한 어른이었다. 그는 선조의 따님이었는데, 손녀인 윤씨에게 사치할 줄 모르게 가르쳤다. 항상 손녀에게 “비록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더라도 앞으로 가난한 선비의 아내가 되었을 때, 견디어 나갈 각오를 늘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하고 검소하게 살도록 타일렀다. 이 가르침이 그대로 윤씨의 자식-김만중·김만기의 훈도에 나타나, 두 형제는 대성하여 후일 대제학을 지냈다. 특히 김만기의 따님인 맏손녀가 숙종의 왕비(인경왕후)가 되었는데도 터럭끝만한 청도 넣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보다도 오히려 역사에 빛나는 왕후들의 얘기를 들려주며 교훈으로 삼게 하였다. 최근 청와대 측근들이 비리에 휩싸이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 세상에서는 생각조차 되지 않는 일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들 어머니상은 현실의 어머니상은 아니다. 현실의 상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의 상을 찾기 위하여, 우선 우리는 이 땅에서 오랫동안 삶을 영위한 우리 어머니들이 땀으로 얻은 고귀한 체험을 발굴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자녀들의 교육에 있어서 학교교육을 생각할 때, 학생인권조례나 만드는 졸렬한 교육행정 이전에, 우리 학부모는 우선 가정교육에 있어서 이 땅의 참다운 어머니상을 되찾아 자녀의 모범이 되는 자기 자신을 되찾아야 할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자기 자식의 교육을 위탁한 교사를 존경하고, 자기 자식의 훈도와 관련된 민원을 제기하거나 학교에 폭언으로 전화질하는 무식한 태도를 없애는데 노력해야 함은 물론, 자기 자신을 수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녀교육에 대한 기초적인 태도일 것이다.

위에서 보듯, 옛날 어머니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적인 신념은 “꽃이 되기보다는 꽃을 키우는 노릇을 하겠다”는 자애로운 사랑 그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자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어머니) 중심의 허영과 욕심으로 사교육을 시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자애로운 엄마를 모르고 항상 쉴 틈을 주지 않는 엄마를 <미워하며> 자라난 어린이들의 인격구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비정상적인 일면을 가진 문제인간이 형성되리라는 것이다. 어린이에게도 마음대로 상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 폭을 넓혀 주어야 하겠다. 이 세대는 옛날의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말이 뒤바뀌어 가고 있다. 엄한 아버지의 모습에 자애로운 어머니상이 우리가정의 일반적인 부모상이겠지만, 세상살이의 변화에 따라 그 반대로 달라지고 있다. 오히려 어머니가 엄하고 아버지가 자애로운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우리는 이제 외국풍에만 시달리지 말고 이 땅에 누천년  연속된 민족의 혼이 벤 어머니상을 재인식함이 어떨까 문제를 던지고 끝을 맺는다.

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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