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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리 고인돌은 제천의식을 하던 제단으로 추정
<살며 생각하며>
이병열(고창문화연구회 기자 / 입력 : 2012년 08월 13일(월)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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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발생의 기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아

고인돌은 그 축조시기가 기원전 오천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 유럽에서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으로 보정하여 고인돌의 축조가 기원전 4,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고 있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고인돌문화권의 고인돌도 과학적인 연대측정이 증가하여 그 축조 연대가 연장되고 있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선사시대인 중석기시대 말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에 주로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동북아시아 고인돌 문화권에서의 고인돌 축조연대는 그 상한선과 하한선이 아직까지 분명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의 북쪽 지역에서는 기원전 4천 년 전부터 기원전 2천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고,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는 기원전 2천년 경에서 3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주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인돌의 전파에 관해서도, 동북아 고인돌문화권에 고인돌 숫자가 많아 자생적으로 발달했다고 보는 자생설과, 외부에서 전래된 문화로 보는 외래유입설이 있고,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먼저 축조되다가 한반도 전역으로 구조가 변형되면서 확산되었다는 설과,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먼저 축조되다가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하게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고인돌 사회는 권력구조가 있던 계급사회

편 고인돌은 그 규모가 크고 공사규모도 해당 사회집단의 크기와 역량에 비하여 대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인돌을 단순한 매장처리 목적의 구조물 개념을 넘어 사후의 세계와 조상신의 존재 및 조상신이 현세에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 등이 존재하던 시기에 축조 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 사회는 규모가 큰 돌을 채석, 운반, 건축하는 기술과 석기, 청동기, 무문토기, 옥 등 발견되는 부장품의 가공기술이 발달되었던 시기이다. 즉 전문 기술을 보유한 장인과 기술의 전수가 이루어졌던 사회로 볼 수 있다. 고인돌 사회의 집단크기는 축조된 고인돌의 규모와 무게로 미루어 고인돌 축조에 동원된 인력을 추산하여 추정되는데, 일반적으로 규모가 큰 고인돌은 대규모 인원동원이 가능했던 계급과 직업의 분화가 진행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고인돌 시대는 수렵채집의 소규모 이동집단 단계를 넘어 정착 농업으로 잉여생산물의 비축이 가능해지고, 인구부양력을 스스로 갖추어 인위적인 인구증가가 가능해진 신석기 농업경제혁명 이후에 농업사회가 어느 정도 정착 발전된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후빙기 이후 기후가 현재와 비슷한 수준으로 온난화 된 시기였다. 고창지역은 고인돌 축조 당시 현재보다 온난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농업경제시대로 접어들면서 농토의 소유권에 대한 개념과 관리 공간 영역에 대한 조정과 분쟁이 발생했을 것이며, 고인돌축조는 대규모 건축공사였기 때문에 장례의례와 추수 후 하늘이나 태양신에게 감사하는 추수감사제도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산리고인돌은 묘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도산리고인돌도 위에서 언급한 장례의례로서의 개념은 아닌듯하다. 그 이유는 먼저 시신을 매장할 부분이 너무 좁고 위로 너무 높아 시신 보관상의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둘째는 유독 하나만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 채석장에서 도산리까지 고창천과 습지를 지나 약 2km나 이동해야하는 악조건이라는 점이다. 셋째는 주변의 죽림리나 상갑리의 개석식 또는 바둑반식의 고인돌과는 다른 특이한 탁자식(북방식) 구조의 고인돌이라는 점이다. 다섯째는 고인돌의 입지가 산줄기의 흐름과 다르게 동쪽으로 기울여 축조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점으로 보아 도산리고인돌은 묘가 아닌 다른 용도로 활용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선사인들은 도산리고인돌을 이곳에 축조했을까?

도산리 고인돌의 모습과 특징

고인돌이 바라보는 받침돌의 앞면은 일자형이지만, 뒷면은 삼각형과 같은 모양의 물고기 꼬리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고인돌을 세운 사람들도 삼각형 모양의 받침돌을 나란히 세웠다는 것은 뭔가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덮개석의 전면은 앞으로 툭 튀어 나왔으며, 후면은 두 받침돌의 끝부분에 맞췄다. 즉 도산리 고인돌은 덮개석이 앞으로 툭 튀어나오게 하였으며, 뒷부분은 삼각형 모양의 받침돌을 만들어, 전면과 후면을 명확하게 구분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풍수상으로도 앞은 낮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지, 높은 뒤쪽이나 산줄기가 내려오는 곳을 향해 바라보는 것은, 일반적인 풍수적 개념과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청동기시대에 풍수적 개념이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풍수개념 중 이기론(理氣論)은 중국에서 발달했지만, 형기론(形氣論)만큼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 민족의 전통풍수개념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도산리 고인돌의 전면은 두 받침돌이 평탄한 쪽이며, 후면은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도산리 고인돌의 형기론적 풍수 해설은 차후에 밝히겠다.

왜 도산리 고인돌은 이렇게 산줄기의 흐름과는 다르게 축조하였는지를 알기 위해서, 나침반을 가지고 고인돌의 방향을 측정하였다. 고인돌의 방향은 두 받침돌과 덮개돌의 장축선을 기준으로 측정하였다. 고인돌이 있는 산줄기의 유주(=흐르는) 방향은 입수각(=기가 명당의 혈처로 들어오는 것으로 이를 풍수 명칭으로 坐라 함)이 169˚이고, 출구각(=기가 명당의 혈처를 빠져 나가는 것으로 이를 풍수적으로 向이라 함)은 126˚이다. 그리고 고인돌이 바라보는 두 받침돌 사이의 각은 약 102˚로 산줄기의 유주 방향과는 다르다.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고인돌을 축조할 때 당시의 천문환경과 현재는 분명 다르긴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와 현재가 그렇게 큰 차이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102˚는 일 년 중 9월 말에서 10월 초의 일출 시간인 아침 8시 전후에 해당하는 방위각이다. 즉 가을 추수기 고인돌을 축조한 당시 사람들은 가장 먼저 정성스럽게 추수한 농산물이나 제물을 도산리 고인돌에 올려놓고, 태양이 호남정맥의 벽오봉 사이로 떠오르면 사람들은 엎드려 태양신께 감사의 의식을 행했을 것이다. 즉 당시 이곳 고창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터전에서의 천신(天神)은 최고의 신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무슨 일이 있으면 하늘님(기독교의 하나님은, 한국에 처음 온 선교사들이 God이라는 개념이 한국에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이해시키기가 어려워,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한국어의 하늘님으로 번역한 것이다. 즉 한국에서 God이라는 개념과 가장 유사한 말을 찾아낸 것이 하늘님, 하느님이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God은 서양 신의 개념이고, 하느님은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신의 개념이다)을 찾는 민족정서가 남아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제천의식과 무속은 선사인들의 영향

이러한 하늘님을 찾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은 선사시대 부족사회 전통에 따라 전승되다가 점차 국가성립과 더불어 국가의례로서 자리 잡았다. 고조선의 신단수, 부여의 영고(12월), 고구려의 동맹(10월), 동예의 무천제(10월)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삼한에서는 일종의 추수감사제인 제천의식이 끝나고, 부족의 모든 사람들이 음주가무가 함께한 성대한 축제로 치러졌다. 백제는 제단을 만들어 천지(天地)와 오제신(五帝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발전하였다. 고려는 강화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조선은 초기 국가적으로 제천의식을 거행했으나 중기부터는 사림파에 의해 쇠퇴하였으며, 그 후 고종황제의 즉위로 상징적 의례로서 제천의례를 실시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가 미신으로 치부하는 무속인이 지금도 천신(天神)·천왕신(天王神)·천신대감신(天神大監神)·제석신(帝釋神) 등 가장 전통적인 우리 민족신을 모시고 있다.

또한 지금도 우리나라는 10월 3일 개천절이라 하여 국경일로 정하고, 마니산의 참성단과 태백산의 천제단 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 이러한 제천의식은 고인돌시대 이전부터 이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하늘에 대한 하느님 숭배의 정신문화였다. 즉 도산리 고인돌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 정서에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는 천신숭배의 정성스런 제단의 시발점이고, 이는 현대의 다양한 축제로 발전하여 민족 공동체의 생활문화로서 오늘날까지 광범위하게 계승·발전되고 있는 민족문화였던 것이다.
이병열(고창문화연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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