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제정되지 못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올해는 정해질 수 있을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기념재단, 정읍 소재)이 주도했지만, 이번에는 정부(문화체육관광부)가 직접 기념일 공모에 나섰고, 가장 첨예했던 정읍·고창을 비롯해 전주까지 선정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동의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물론 부안은 동의서를 작성하지 않았고, 부안·정읍의 일부단체들이 현재 진행과정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등 불씨는 남아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2004년 3월) 이후 준비절차를 거쳐 2005년부터 본격 제정논의가 시작됐으니 열세해 동안 표류돼 왔으며, 이보다 앞서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계기로 기념일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므로 24년이 경과됐다고도 볼 수 있다. 그동안 문화체육관광부의 위임을 받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기념재단)을 중심으로 유족회, 천도교, 학계, 전국의 기념사업단체 등이 참여해 수차례 시도했지만, 몇 차례 후보일이 결정되기도 했지만,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면서 결정적인 단계에서 번번히 좌절되었다.
지역간 합의만을 독려하며 시간만 소요했던 이전 정부와 달리, 문체부가 9월초 전국 지자체 등을 대상으로 기념일 후보 신청을 받으면서, 올해 내로 기념일을 최종 선정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상과 달리 충남·전남 등지에서 지원하지 않았고, 고창·정읍·부안·전주만이 후보일을 제출했다. 후보일은 무장기포 4월25일(음력 3월20일), 백산대회 5월1일(음력 3월26일), 황토현전투 5월11일(음력 4월7일), 전주화약 6월11일(음력 5월7일)이다.
“만인 일이 발각되어도 누가 주동자인지 알 수 없다. 사발 모양으로 서명한 거사계획 사발통문. 수탈의 상징, 고부관아 습격!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 아직은 지방고을의 민란. 전봉준과 호남 최대접주 손화중의 연합. 고부에서 지핀 불씨가 전국으로 확산. 혁명의 시작. ‘나라를 어려움에서 구해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합시다!’ 혁명의 포부를 선언한 무장기포 4월25일.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반봉건·반외세를 천명한 격문을 각지에 발송, 호남 일대 동학농민군이 백산에 집결, 5월1일. 그리고 혁명에 자신감을 얻게 된 황토현 승전. 관군과 맞선 최초의 전투를 최대의 승리로 이끌다. 5월11일. 마침내 호남 54개 고을에 집강소 설치. 역사상 최초로 농민주도 지방자치를 열어, 아시아 민주주의의 기원으로까지 평가. 그 계기가 된 조선왕조의 본관 전주성 점령. 그리고 전봉준과 전라감사가 전주에서 화약을 체결, 6월11일. 혁명이 끝내 넘지 못한 고빗길. 전국의 동학군이 총집결 했음에도–‘화승총은 무라다총에 미치지 못해, 총기싸움이 일본군 1이 동학당 100에 필적한다’(도비쓰카 류)-미완의 혁명을 후세에 부탁한 우금치전투 12월5일.”
문체부는 10월17일 오후 2시,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 선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고창·정읍·부안·전주지역 주민 5백여명이 참여했으며, 4개 후보일을 대표하는 연사들이 발표자로 나섰다.
고창군, 무장기포일 4월25일(음력 3월20일)
유바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는 2004년 3월 제정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동학농민명예회복법)’이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1차로 봉기하고”라고 명시한 대목을 들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1894년 음력 3월이고 대다수 연구자들은 음력 3월20일 즉 무장기포일을 3월에 일어난 첫 봉기로 본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당시 전북 고부군·현 정읍시 일원) 일대 사람들이 1893년 말 봉기를 계획한 후, 1894년 1월 고부봉기를 일으키고 이를 확대하고자 노력했으나 지역적 한계를 넘지 못해 실패한 후, 전봉준은 전북 고창군 무장면으로 와 손화중을 비롯한 전라도 각지의 지도자 및 동학교단과 연계해 무장포고문을 발표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이 시작했다”면서 “무장포고문 발포일인 4월25일(음력 3월20일)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뚜렷하고 분명한 역사성을 지닌다”고 말했다.
“과거 역사적 사건에서 보듯 3·1운동, 4·19혁명,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대혁명 등 최초 선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기념일로 정했다”며 “무장기포일이야말로 혁명의 시작을 알린 공식적인 선언이었기에 무장기포일이 기념일로 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안군, 백산대회일 5월1일(음력 3월26일)
박대길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료조사위원(전 정읍시청 동학선양담당)은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개 과정의 정점이 백산대회”라고 강조했다. “1894년 1월10일(음력) 고부봉기로 시작한 혁명의 지휘소를 그해 2월25일(음력) 부안군 백산면에 설치한 후 동학혁명군이 주둔했고, 3월20일(음력) 무장기포 후 3월26일(음력) 백산에서 혁명군으로서 동학농민군이 대오를 편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백산에서 나온 격문을 보면 반봉건·반외세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했고, 이때야 비로소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조 규율을 반포했다”면서, “동학농민혁명의 혁명성을 가장 잘 드러낸 격문을 각지에 발송해 호남 일대 동학혁명군이 백산으로 집결했다”고 주장했다.
박 조사위원은 백산대회일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부봉기와 무장기포·백산대회 사이를 단절하고, 고부봉기는 민란으로 백산대회는 실체불명 혹은 의미축소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정신과 취지에 어긋난 절차와 진행 과정이 있다”면서 “역사적 사건보다 지자체 유불리 판단에 따라 특정일을 추천하고 있다. 게다가 전라북도로만 한정해서 전국화에 역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결과적으로 전라북도에서만 후보가 나온 것이지, 문체부가 전라북도로만 한정해서 후보일을 받은 적은 없으며, 전라북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은 후보일을 추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읍시, 황토현전투일 5월11일(음력 4월7일)
조광한 동학역사문화연구소장은 발표에 앞서 홍보영상을 화면에 띄웠다. “동학농민군은 황토현전투 승리 이후 그 기세를 몰아 진격하였고, 사람답게 살아보겠다 뛰어든 이들은 혁명의 불꽃을 피워냈다. 1894년 황토현, 그곳에 전봉준이 있었다. 반부패·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역사의 혁명”이라는 문구가 공청회장을 울렸다.
조 소장은 “황토현전승일은 전봉준 등 각 지역 동학농민군 부대가 하나가 되어, 최초로 관군과 격돌한 조직적인 전투이며, 동학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날”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날 승리로 혁명의 불길이 들불처럼 타올라 전국으로 확산했고, 이후 장성의 황룡전투를 거친 뒤 전라감영의 심장부인 전주성을 점령했다”고 설명하며, “당대 석학 고(故) 김상기 박사의 발의와 민간단체 주도로 1963년 10월3일 황토현전승지에 최초의 상징기념물을 건립했다”고 밝혔다.
전주시, 전주화약일 6월11일(음력 5월7일)
이상식 전남대학교 명예교수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는 전라도 수부였고, 모든 싸움은 전주성을 차지해 역사적인 결정을 했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효시인데, 그 출발은 전봉준과 전라감사가 전주에서 화약을 체결해 농민 통치를 이룩하자는 약속을 한 날이다. 민주주의 하면 풀뿌리 민주주의를 찾는데, 바로 농민이 주인이 되어 이 나라를 간섭 없이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날이 전주에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화약은 화목하게 지내자는 약속이라는 뜻이며, 동학농민군이 조선정부와 협의해 혁명과업 수용 결과를 도출했다”는 게 이 명예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조선정부가 동학농민군의 존재를 공식 인정했고, 청과 일본을 몰아내야 한다는 자주적 공감대를 형성해 민족적 단결을 이뤘다”며, “집강소는 관민통치 또는 농민통치의 실현이며,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민주주의 시발적인 사건이자, 한국의 자생적 민주주의라는 평가”라고 말했다. 집강소는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지역에 설치한 자치 개혁 기구를 말한다.
공청회가 열린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 총 204석은 사전 등록으로 만원을 이뤘다. 공청회가 열리기 1시간 전부터 고창군·부안군·정읍시·전주시 등에서 온 시민과 유족들로 성황을 이뤘다. 공청회 시작 30분 전부터는, 공청회 절차를 비판하며 고부봉기를 논의에서 제외한 데 반발하는 이들이 손팻말과 펼침막을 들고 항의하는 등 소요가 있었다. 이들이 펼침막을 들고 공청회 장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하자 관계자와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경찰이 출동한 후에야 상황은 일단락했다.
이들은 4명의 발표자가 발표를 끝낸 후 질의응답 시간에, 고부봉기를 누락한 데 강한 불만을 표명했다. 이들 중 한 명은 “전봉준은 고부봉기를 처음 시작했는데, 기념일을 제정한다면서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에서) 아예 뺐다. 고부봉기를 혁명에서 빼고 논의한다면 전봉준은 민란의 수괴가 된다. 1894년 3월20일 무장기포의 시발점은 1893년 11월 사발통문이며, 이듬해 1월11일 고부봉기로 전봉준은 혁명지도자가 됐다”며 고부봉기의 역사적 의미를 물었다.
유바다 교수는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 시작을 예비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오늘날 고부봉기를 들어 전봉준을 민란의 수괴라고 지칭하는 연구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이전의 사발통문은 물론 전봉준을 중심으로 이뤄진 각종 집회도 동학농민혁명의 예비적 단계로 높이 평가한다”면서도, “다만 학계 전체가 동학농민혁명의 ‘전국적인’ 시작을 무장포고문 발표일로 본다”고 말했다.
박대길 조사위원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에 있어 답답한 건 고부봉기와 무장기포를 단절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부에서 실패해 오갈 데 없는 전봉준이 무장에 가서 다시 봉기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고부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은 실패자이고 민란의 수괴가 된다”며, “전봉준은 세상을 변혁하려 동학에 가입했고, 혁명지도자들과 만나 혁명을 구상하다 결정적으로 터뜨린 곳이 고부였다”고 주장했다.
조광한 소장은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다. 고부봉기 때의 전봉준과 무장기포 때의 전봉준, 백산대회 때의 전봉준이 다를 리 없다.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라는 점은 팩트”라면서도, “시작일로만 한다면 정읍에서 고부봉기를 기념일로 주장했겠지만, 이는 기념일을 제정하는 여러 기준 중 하나였기에, 상징성과 지역참여도를 고려한 후 고부봉기를 주장하는 분들과 상의해 황토현전승일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상식 명예교수는 “2004년 2월 동학농민명예회복법이 통과하면서 동학‘난’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으로 명예회복했다. 고부에서 시작했기에 고부봉기는 당연히 명예회복을 했고,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의 하나라고 봐야 한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청회가 진행되는 도중 발표자에게 반발하거나, 질문하는 청중을 고성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공청회는 예정한 3시간을 꽉 채운 후 오후 5시께 종료했다. 이경훈 문체부 문화정책관은 “전문가들로 꾸린 선정위원회가 학술자료, 기념일 신청안, 공청회 결과 등을 토대로, 공정한 절차를 거쳐 법정기념일을 최종 결정한다”고 밝혔다. 문체부는 이미 “올해 안으로 기념일을 최종 선정할 예정”이라고 밝힌 상태다. 선정위원회 대표위원은 이승우 기념재단 이사장, 이정희 천도교 교령, 이기곤 유족회 이사장,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장으로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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