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홍훈(1946~2021). 출처=KBS | ⓒ 주간해피데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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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하루는 나머지 삶의 전부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루를 못 넘기고 그날을 못 넘기면 죽는 거거든요. 오늘도 살아있구나,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야지,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출발하고 이렇게 같이 지내니까 좋아요.”
이홍훈 전 대법관이 지난 7월11일(일) 오전 6시50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유족은 부인 박옥미 씨, 아들 도헌 씨 등이 있다. 고창 태생인 이 전 대법관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사법연수원 4기로 1977년 법관에 임용됐다. 이후 서울고법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원장을 거쳐, 노무현 정부 때 대법원장 제의를 받았지만 ‘대법관이 대법원장을 하는 것이 순리’라며 고사했다. 환갑을 맞이한 2006년 뒤늦게 대법관에 올라 2011년 대법관에서 퇴임했다.
법관에 임용된 뒤 꾸준히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판결을 내놓아 ‘사법부 내 재야’라는 소리를 들었던 그는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대법관을 지냈다.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과 사법 정의를 중심에 두고, 기본권 보호에 충실하면서도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판결을 많이 내렸다는 평가다.
이적표현물 제작·배포의 처벌과 관련한 국가보안법 조항은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있을 때만 적용해야 한다며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무급휴직원을 내고 출산을 했더라도 근로기준법상 출산휴가 2개월간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면서, 노동자의 기본권을 보호한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조건 업무방해로 간주해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며, 단순 파업도 당연히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고 여겼던 기존 대법원 판례를 변경하기도 했다.
2006년 당시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에 관심을 갖고 판결을 해 왔고, 이를 통해 대법원의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고, 대법관이 된 뒤 이 소신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1년 4월 ‘4대강 사업 집행정지 신청 사건’ 기각 때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신청을 기각한 원심을 확정했지만, 주심이던 그는 국책 사업도 적법한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소수 의견을 내 화제를 불러왔다. 그는 2020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그 당시를 회고했다. “(제 생각을) 역사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후대에 4대강 사업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데, 그때 대법원은 무엇을 했느냐고 할 때, 대법원이 이렇게 고민하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정성을 들이고 열심히 기록 검토도 했습니다.”
그는 2011년 대법관을 마지막으로 법복을 벗었다. 퇴임사 마지막 줄에 ‘대법관’이 아닌 ‘법관 이홍훈’이라고 쓰고서 낡은 승용차를 타고 고향인 고창 흥덕면 신송마을로 향했다. 대법관 퇴임 이후에는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과 화우공익재단 이사장, 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2017년부터 2년 동안 서울대학교 법인 이사장을 지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개혁방안 마련을 위해 설치한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는 등 최근까지도 법조계 원로로 활동했다.
그는 대법관 퇴임 후 법조계 등에서 활동하면서도, 10년간 자신이이 태어난 집 앞 고향 땅을 일구어 ‘저스티스가든’이라는 이름의 정원을 가꾸었다. 그 정원에서 주민과 함께하는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그 사이 그의 몸에도 변화가 있었다. 2017년 담도암에 걸려 담도를 제거했다. 암은 간으로 전이돼 간도 잘라냈다. 수술하면 80%는 2년 이상 연명하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왔지만, 그는 담담했다. 고인은 하루가 삶의 전부라고 여기고, 날마다 정원 일을 하며 면역 요법을 병행했다. 정원을 가꾸며 치유의 힘을 얻었다면서 4년 가까이 암과 동행했다. 그는 7월13일(화) 자신이 가꾼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고향 선영에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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