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12월17일 서울 헌법재판소 앞, 핵발전소지역대책협의회와 탈핵법률가모임 해바라기 관계자들이 주민 기본권을 침해하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법’의 위헌성을 주장하며 헌법소원 제기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 ⓒ 주간해피데이 | |
정부가 영구처분장 마련 전까지 핵발전소 부지 내에 핵폐기물(사용후핵연료 포함)을 저장할 수 있도록 허용한 ‘고준위방사성폐기물법’은 소수 지역주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적 폭력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은 “고준위 핵폐기물을 기존 원전 부지에 저장하도록 허용한 법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요청했다. 핵발전소 주변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장기간 방사능 위험을 감내하도록 강제하는 입법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주장이다.
핵발전소지역대책협의회와 탈핵법률가모임 해바라기 등은 12월1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준위방사성폐기물법’과 그 시행령에 대한 법령위헌 헌법소원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이번 헌법소원에는 부산·울산·경주·영광·울진 등 원전 소재 지역과 고창·광주 등 인접 지역을 포함해 전국 284명이 청구인으로 참여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핵발전소 반경 5킬로미터 이내 거주 주민과 80킬로미터 이내 환경영향평가 대상 지역 주민들이다.
이번 헌법소원의 핵심은 지난 9월26일부터 시행된 고준위방사성폐기물법이 주민들의 환경권, 행복추구권, 알 권리 및 평등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구인들은 고준위방사성폐기물법이 부지 적합성에 대한 엄격한 검토 없이 기존 원전 부지를 핵폐기물 저장 장소로 못 박은 점을 핵심 문제로 지적했다. 이 법은 2050년까지 중간저장시설, 2060년까지 영구처분시설을 마련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일정이 지연될 경우 사실상 원전 부지가 장기적인 고준위 핵폐기물 저장 공간으로 고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민 반발이 이어져 왔다.
청구인 측은 “부지 적합성에 대한 엄격한 검토 없이 인구 밀집 지역인 기존 원전 부지를 저장시설 부지로 정한 것은 환경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처분적 입법”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사용후핵연료에는 세슘137, 스트론튬90, 플루토늄 등 반감기가 수십 년에서 수만 년에 이르는 방사성 물질이 다량 포함돼 있어 수십만 년에 걸친 관리가 필요한데도, 법안이 대형 지진이나 테러 가능성 등 원전 부지의 안전성에 대한 세밀한 평가 절차를 생략했다고 비판했다. 단지 운영의 편의성과 비용 절감만을 기준으로 기존 부지 활용을 허용했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쟁점은 주민 의견수렴 대상 지역 범위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법 시행령은 주민 의견 수렴 범위를 시설 반경 5킬로미터로 제한하고 있다. 방사능 재난 시 직접적 영향권인 ‘방사선환경영향평가’ 대상 지역은 반경 80킬로미터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의견 청취 대상을 5킬로미터로 좁게 설정해 5~80킬로미터에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을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했다는 주장이다. 즉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시설임에도 80킬로미터 이내 주민을 배제한 것은 알 권리와 평등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청구인 대표로 발언한 경주 월성 인근 주민 황분희씨는 “말만 임시저장시설이지 실제로는 전국 원전 부지마다 핵폐기장을 만드는 법”이라며 “원전 지역 주민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를 더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법률대리인 김영희 변호사는 “부지 적합성 검토와 방사선환경영향평가 없이 위험을 특정 지역 주민에게 떠넘기는 것은 소수자를 차별하는 위헌적 입법”이라며, “헌법재판소가 법을 폐기하고 보다 안전한 관리 체계를 마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고창지역에서 참여한 윤종호 청구인(핵없는세상을위한고창군민행동 운영위원장)은 “핵발전소 지역주민들에 대한 어떤 동의도 없이, 기존 핵발전소 부지에 임시저장이라는 이름으로 고준위 핵폐기장을 강요하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법과 그 시행령은 너무나도 잘못된 악법”이라고 지적했다. 고창지역은 군수의 반대 기자회견, 군의회의 반대 결의문, 한수원 앞 궐기대회, 산업부 항의 방문 등의 반대 의사를 표명했지만, 고준위방사성폐기물법과 시행령의 단 한자도 수정할 수 없었다. 윤종호 청구인은 “‘이것이 민주주의인가’라는 강한 의문이 든다”며, “다수가 법을 핑계로 지역을 차별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구조적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 뜻 있는 지역주민들을 공개 모집하여 헌법소원 청구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번 헌법소원은 고준위 핵폐기물 문제를 헌법상 기본권의 문제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헌법재판소는 향후 고준위법이 규정한 부지 내 저장시설의 성격이 기존 중간저장시설과 동일한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기본권이 실질적으로 침해되는지를 심리할 것으로 보인다. 헌법소원 심판 청구는 법령 시행 후 90일 이내에 제기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지난 11월28일부터 12월14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청구인 모집이 급박하게 진행됐다. 핵발전소 인근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감내해야 하는 위험의 범위와 책임의 주체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향후 에너지 정책과 지역 형평성 논의에 중요한 기준이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