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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질 지역의 기억을 붙잡아, 한 도시를 여행지가 아닌 ‘사람이 살아온 시간’으로 읽어내는 책이 나왔다. 최은희 작가의 ‘정읍’은 관광지의 목록을 다시 나열하는 대신, 한 사람이 30년 가까이 살아낸 도시의 풍경과 역사, 그리고 그곳을 바꿔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인문지리지로 엮어냈다. 최은희 작가가 쓴 ‘정읍’(7월30일 발행)이 ‘21세기북스’의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 20번째 책으로 출간됐다.
이 책을 쓴 최은희 작가는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서울 생활을 거쳐 1996년 정읍에 정착했다. 청소년 인문학 교육과 문화관광해설, 인문학 강의와 문화기획 활동을 이어왔고, 1인 출판사 ‘샘바다’를 통해 지역 책을 펴냈다. 지역 신문에는 동학역사소설 ‘개남(開南)’을 연재했으며, 시민단체 ‘동감’의 활동가로 환경과 동물권, 투명한 행정을 위한 활동도 해왔다. 현재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해설사로 일하고 있다.
최 작가는 ‘정읍’을 ‘생명의 쌀바다’, ‘혁명의 샘바다’, ‘생명애 도시 정읍(바이오필리아 시티·Biophilia City)’이라는 세 개의 언어로 풀어낸다. 광활한 호남평야와 농업의 역사, 동학농민혁명의 기억, 자연과 생명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활동을 하나의 도시사로 연결한 것이다. 책의 출발점은 ‘정읍(井邑)’이라는 이름이다. 작가는 우물 정(井)자를 품은 정읍을 새로운 변화의 물줄기가 솟아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큰 우물에 비유한다. 쌀이 생산되고, 역사적 변화가 시작됐으며, 오늘도 사람들의 삶과 시민운동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공간이라는 해석이다.
여행 안내서의 형식을 빌린 도시의 기록
책은 ‘정읍의 짧은 역사’를 시작으로 정읍사문화공원, 대일정, 충렬사, 신성공소, 솔티숲, 기적의 도서관, 만석보 쉼터, 쌍화차 거리, 정읍아산병원 등 정읍의 대표적인 역사·문화·관광 공간 25곳을 차례로 소개한다. 목차만 보면 익숙한 지역 관광자원을 나열한 안내서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장소는 단순한 관광 정보보다 그 공간에 축적된 사람들의 기억과 역사에 초점을 맞춘다.
첫 장에 배치된 정읍사문화공원에서는 현존하는 한글 기록의 가장 오래된 노래로 알려진 ‘정읍사’를 통해 정읍의 문화적 뿌리를 살핀다. ‘악학궤범’에 기록된 노랫말과 음악의 변주까지 따라가며, 오래된 노래를 박제된 문화재가 아닌 당시 사람들의 살아 있는 문화로 읽어낸다. 신성공소에서는 병인박해 이후 정읍 지역에 형성된 교우촌과 공소의 역사를 짚는다. 책에 따르면 1866년 병인박해 이후부터 1911년까지 정읍에는 교우촌을 기반으로 형성된 공소가 73개에 이를 정도로 천주교 공동체가 확장됐다.
쌍화차 거리는 정읍 사람들의 생활문화로 접근한다. 정읍경찰서에서 정읍세무서까지 이어지는 약 350m의 거리를 따라 형성된 쌍화차 문화를 지역의 대표적인 음식과 일상의 풍경으로 풀어낸다. 내장산에서는 단풍의 아름다움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장사에서 이어지는 108그루 단풍나무에 담긴 전쟁의 상흔과 화해의 의미를 함께 짚는다. 풍경 뒤에 남아 있는 역사까지 읽어내는 방식이다. 이처럼 책은 백제의 ‘정읍사’에서 조선시대의 무성서원,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를 지켜낸 역사, 동학농민혁명과 근현대사까지 정읍의 시간을 폭넓게 훑는다.
‘생명의 쌀바다’에서 ‘혁명의 샘바다’로
최 작가가 바라보는 정읍의 첫 번째 풍경은 호남평야다. 눈 닿는 곳까지 이어지는 들판은 단순한 농업 생산지가 아니라 오랜 시간 지역의 역사와 경제를 움직여온 공간이다. 작가는 이를 ‘생명의 쌀바다’라고 부른다. 통일신라시대 태산과 고부 일대의 광활한 쌀 생산지는 중요한 세원의 기반이었고, 서해를 통한 교역과도 연결됐다. 정읍의 들판은 오늘의 농업 풍경을 넘어 천년 넘게 이어져 온 지역의 역사적 기반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축은 동학농민혁명이다. 1894년 고부 만석보의 부당한 물세에 맞선 농민들의 움직임은 황토현 전투로 이어졌고, 정읍은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한 변화가 시작된 공간 가운데 하나가 됐다. 최 작가는 이 역사를 ‘혁명의 샘바다’라는 표현으로 압축한다. 잘못된 현실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샘물처럼 솟아 전국으로 퍼져나갔다는 의미다. 책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과 만석보 쉼터, 대뫼마을의 사발통문 등 혁명의 기억이 남은 공간들이 등장한다. 역사적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정읍 풍경 속에서 그 기억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살핀다.
개발의 도시가 아니라 ‘생명애 도시’를 묻다
‘정읍’이 지역 소개서의 범위를 넓히는 지점은 자연과 시민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다. 최 작가는 오늘의 정읍을 ‘생명애 도시’, 즉 바이오필리아 시티(Biophilia City)로 표현한다.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시민들의 활동을 도시의 중요한 역사로 기록한 것이다.
책에는 내장산 상설 소싸움 도박장 건립 반대와 동물 학대 소싸움대회 폐지 운동이 등장한다. 시민들은 2016년부터 소싸움 폐지를 요구하는 활동을 이어갔고, 시청 앞 1인 시위도 계속됐다. 책은 이 과정을 정읍이 전국 소싸움대회 개최지역 가운데 소싸움을 폐지한 사례로 기록한다.
내장호 보전, 상두산 석산 개발에 따른 환경파괴와 주민 피해 문제, 산업폐기물로 인한 환경오염, 안전한 식수원 보호를 위한 활동도 함께 다룬다. 특히 책의 마지막에 소개되는 내장호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내장저수지 준설과 인공성 보강공사를 언급하며 개발과 보전의 문제를 제기한다. 결론을 독자에게 강요하기보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기는 방식이다. 정읍을 만들어가는 주체를 행정이나 개발사업에 한정하지 않고, 서원을 돌보는 마을 사람과 동학의 기억을 전하는 해설사, 자연을 지키려는 시민, 지역에 뿌리내린 청년들까지 폭넓게 조명한 점도 이 책의 특징이다.
30년을 살아낸 사람이 안내하는 정읍
‘정읍’의 시선에는 외부 여행자의 거리감보다 오랜 거주자의 시간이 배어 있다. 최 작가는 서울 생활을 거쳐 정읍으로 내려와 아이를 키우고 사계절을 보내며 도시의 변화를 지켜봤다. 힘들고 외로울 때 기대어 쉬고 머물 수 있는 소도시로서의 정읍, 자연환경과 사람의 인정이 함께 남아 있는 정읍이 책 곳곳에 담겼다. 최은희 작가는 “정읍이 조선시대 방각본 출판이 고장이라는 점에 흥미를 느껴 ‘샘바다’라는 1인 출판사를 만들었고, 그 계기로 이 책의 집필을 의뢰받았다”며, “신태인역 지하도에 걸린 김택근 시인의 시처럼 정읍은 어머니 품 같은 도시, 자연환경과 인정이 살아있는 도시, 힘들고 외로울 때 등을 기대로 쉴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411쪽의 ‘정읍’은 결국 한 도시의 명소를 모아놓은 책이라기보다, 그 장소들을 통해 ‘정읍은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묻는 기록에 가깝다. ‘정읍사’를 부르던 사람들의 시간에서 호남평야의 농업과 동학농민혁명, 무성서원의 선비문화, 내장산의 전쟁 상흔, 오늘의 환경과 생명을 둘러싼 시민들의 움직임까지. 책은 서로 다른 시대의 장면들을 하나의 도시 안에서 다시 연결한다.
‘기록되지 않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 잊힌다’는 책의 문제의식처럼, ‘정읍’은 잘 알려진 관광지의 이름 뒤에 가려졌던 사람과 장소의 이야기를 다시 불러낸다. 지역을 소개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한 도시가 스스로의 기억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를 보여주는 지역의 인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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