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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체류와 이동을 위해 필요한 신분증명서다. 정읍에서 일하던 필리핀 계절근로자들이 수개월 동안 자신의 여권을 돌려받지 못했다가 최근 반환받으면서, 행정절차와 노동자 보호 사이에 놓인 여권 관리의 책임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5월 입국 뒤 4개월, 여권은 정읍시에
정읍시는 지난 5월 입국한 필리핀 계절근로자들의 여권을 외국인등록과 보험 처리 등 체류 관련 행정절차를 위해 제출받았다. 이 가운데 59명의 여권이 반환되지 않던 사실이 확인됐다. 정읍시는 여권을 행정절차를 돕기 위해 제출받았으며 반환이 늦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정읍시 관계자는 “행정절차를 돕는 과정에서 여권 반환이 늦어졌다”며 “행정 처리가 끝난 뒤 바로 돌려줬어야 했다”고 밝혔다.
정읍시의 설명에 따르면 올해 5월 입국한 계절근로자는 160여명이다. 이 가운데 통장 개설 등으로 여권이 필요해 먼저 찾아간 노동자들도 있었고, 나머지 59명의 여권이 계속 보관됐다. 행정절차를 위해 제출받은 여권이라면, 절차가 끝난 뒤에도 수개월간 반환되지 않은 이유와 계속 보관한 기준부터 설명돼야 한다.
‘이탈 방지’ 설명 뒤 “잘못된 답변”
여권 보관 목적을 둘러싼 정읍시의 설명은 뒤죽박죽이었다. 고용주나 브로커가 이주노동자의 여권을 보관하는 사례는 종종 있었으나, 지자체가 직접 여권을 보관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해당 이주노동자가 동행한 한 방송사의 취재 당시, 정읍시가 처음에는 필리핀 지자체와 체결한 양해각서(MOU)에 여권 보관 내용이 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취재진이 협약서를 보여달라고 요구하자 해당 내용은 없다고 설명을 바꿨다.
그러다가 정읍시는 과거 계절근로자의 작업장 이탈이 많았고, 이탈을 막기 위해 여권을 보관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그 자리에서 한 고용주는 계절근로자의 여권을 시청에 맡겨두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법무부 출입국 조사관까지 출동해서 여권 반환을 종용하자, 정읍시는 보관하던 여권을 가져와 노동자들에게 돌려줬다.
정읍시는 이후 이 설명을 잘못된 답변이라고 정정했다. 정읍시는 “당시 담당자가 부재 중이었고, 인터뷰했던 과장이 업무 숙지가 잘 안 된 상태에서 그렇게 답변한 것”이라고 밝혔다. 정읍시는 여권 보관 목적이 계절근로자의 이탈 방지가 아니라, 외국인 등록과 보험 처리 등 행정절차였다는 입장이다. 약 4개월간 반환이 늦어진 부분에 대해서는 “지체된 부분은 시정하고 앞으로 관리 방식도 바로 개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내 여권’이 핵심
이주인권단체가 문제 삼는 지점은 행정절차 자체가 아니다. 노동자가 자신의 여권을 직접 보유하지 못한 상태가 장기간 이어졌다는 데 있다. 전북이주인권노동네트워크는 정읍시가 약 2년 전부터 계절근로자가 입국하면 여권을 보관했다가 귀국할 때 돌려주는 방식으로 관리해 왔다고 주장한다. 여권 보관이 사업장 이탈을 막기 위한 통제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정읍시는 과거에도 같은 방식으로 관리했다는 주장에 대해 “현재 문제가 된 사례를 기준으로 확인된 것이며, 과거에도 그랬다는 것은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전북이주인권노동네트워크는 이번 사례를 두고 “지자체가 직접 이주노동자의 여권을 보관하고 돌려주지 않은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주장했다. 이어 민간 전문가와 이주인권단체, 외국인 당사자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전수조사와 상시 관리·감독 체계를 요구했다.
143명 점검했지만 여권 문제는 확인 못해
관리·감독의 실효성도 쟁점이다. 정읍시는 지난 5월 말 계절근로자 143명을 대상으로 인권·노동환경 실태를 점검했다. 인권침해 여부와 고용주의 준수사항 등을 확인하는 점검이었다. 하지만 그 점검에서도 여권 보관 문제가 확인되지 않아 자체 점검의 실효성에 의문이 있다는게 이주인권단체의 지적이다. 단체는 지자체 자체 점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외부 기관이 참여하는 전수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여권 반환됐지만 논란은 인권위로
사건은 여권 반환으로 끝나지 않았다. 9월28일 필리핀 계절근로자 카렌(가명) 씨와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정읍시와 담당 공무원, 고용주 등을 조사해 달라는 진정서를 냈다. 카렌 씨는 기자회견에서 “계절근로자로 일하는 동안 브로커로부터 급여를 공제 당했고, 고용주가 초과수당을 주지 않았다”며 “향후 한국에서 일할 계절근로자들이 저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는 여권 문제와 함께 브로커의 중간착취, 노동조건 등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전북본부도 정읍시에 여권 보관을 결정한 주체와 근거, 보관 인원과 기간 등을 공개하고 피해 노동자에 대한 공식 사과와 책임자 조사,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전북도는 사안을 인지한 뒤 도내 14개 시·군에 유사 사례를 확인하고 필요한 조치를 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전북도 관계자는 “앞으로 현장 확인 과정에서 계절근로자와 직접 면담해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여권은 이미 노동자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반환으로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다. 누가, 어떤 근거로, 왜 여권을 장기간 보관했는지에 대한 정읍시의 설명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동시에 다시는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체계를 어떻게 고칠 것인지도 남은 과제다. 국가인권위 진정과 전북도 차원의 14개 시·군 점검이 이 같은 쟁점에 어떤 답을 내놓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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