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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가까이 도심을 지켜온 은행나무를 베어낼 것인가, 열매의 악취를 감수하며 함께 살아갈 것인가. 정읍의 가로수 관리 문제를 놓고 시민들이 나무와 새, 곤충의 입장까지 대변하며 공존의 해법을 찾는 자리가 마련됐다.
전북생명평화포럼은 10월23일 오후 7시 정읍시 상동 공감플러스센터 3층 강당에서 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정읍 은행나무의회’를 개최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후원하는 2026 지역인문실천 ‘전북답게―생명의 소리 마당’ 사업의 하나로, 전북생명평화포럼이 주최하고, 정읍동학시정감시단·정읍한살림이 주관했다. 정읍시의회 이복형 의장과 이도형·이슬비 의원, 정읍시 산림녹지과 관계자들도 참석해 시민들의 의견을 들었다.
논의의 출발점은 가을마다 반복되는 은행 열매의 악취와 보행 불편이다. 정읍시의 은행나무 가로수 2840그루 가운데 열매를 맺는 암나무는 800여그루에 달한다. 시가 민원 해소를 위해 추진하는 암나무 제거와 수나무 교체를 놓고 생활환경 개선과 기존 수목 보존이라는 서로 다른 요구가 맞서고 있다. 특히 상동 일대 은행나무는 약 40년 동안 도심의 그늘과 경관을 형성해 온 가로수라는 점에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이날 토론에서는 악취로 인한 상권 피해와 보행 불편을 호소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도 나왔다. 민원 처리와 예산, 현장 노동, 안전관리 등 행정이 고려해야 할 현실적인 조건도 함께 제시됐다. 반면 기존 나무를 제거하면 오랜 세월 형성된 도심 생태환경까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열매로 인한 불편을 줄이면서 수목을 관리할 수 있는 대안을 함께 살펴보자는 취지였다.
토론 방식도 기존의 찬반 토론과 달랐다. 참가자들은 은행나무, 주민·상인, 공무원 등 가로수 관리자, 새·곤충을 비롯한 도시생태계, 미래세대 등 5개 대변인단으로 나뉘어 각자의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했다. 사람이 아닌 존재의 처지까지 시민들이 대신 설명하는 ‘만물의회’ 형식이다. 은행나무의 생육과 그늘, 거리의 기억부터 도시 생태계의 연결망과 장기적인 기후변화까지 논의의 범위를 넓혔다.
행사는 ‘생명의 그물’, ‘생명의 소리’, ‘생명의 원탁 및 공동의 제안’ 등 3단계로 구성됐다. 참가자들이 원탁별로 의견을 나누고 공동의 제안을 마련해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특정 결론을 강제하거나 표결로 승패를 가르기보다 서로 다른 입장을 기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시 낭송과 음악, 은행잎 엽서 쓰기 등 문화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주최 측 관계자는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도심 한복판에서 매연과 공기오염을 견디며 정읍 시민들에게 그늘과 맑은 공기를 제공해 왔다”며 “열매로 인한 불편함만을 이유로 암나무를 일개 소모품처럼 베어내는 것은 수십 년간 형성되어 온 생태적 터전을 일시에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새와 곤충 등 비인간 존재를 대변한 참가자들도 “은행나무는 인간만의 가로수가 아니라 수많은 미생물과 새, 곤충이 공존하는 도심 속 생태 거점”이라며 생물다양성 보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공론장은 약 2억년의 역사를 지닌 은행나무를 인간의 생활 편의와 함께 도시를 구성하는 생명체로 바라보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전북생명평화포럼 김택천 공동대표는 행사에 앞서 “기후위기와 생태 전환의 시대에 우리가 마주한 지역의 문제는 인간 중심의 편의를 넘어 모든 생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풀릴 수 있다. 은행나무와 도로, 새, 미래세대 이르기까지 도시를 이루는 비인간 존재들의 입장을 함께 헤아리는 일은 지역사회의 상상력과 생태적 감수성을 넓히는 매우 소중한 첫걸음”이라고 밝혔다.
정읍동학시정감시단 하승찬 대표도 암나무 제거를 둘러싼 갈등을 시민과 행정이 함께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청소년 공부방을 운영하며 아이들과 참가한 교사는 은행나무와 도로, 새의 입장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과정이 미래세대에게 살아 있는 인문학 교육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읍한살림 허금련 이사는 생명을 존중하는 생활 방식과 도시 생태환경의 보존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사에 참여한 동학시정감시단 최은희씨는 “지구와 지역에 살아가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며 “이번 만물의회를 시작으로 인간과 자연이 상생할 수 있는 지혜로운 도심 생태 정책이 지속적으로 논의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최 측은 이번 의회에서 나온 5개 대변인단의 제안과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정읍 생명의 소리 보고서’로 정리할 예정이다. 보고서는 정읍시와 시민사회에 공유하고 향후 지역 생태환경 정책과 문화활동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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